평창 겨울올림픽 좌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이건희 IOC 위원이 2014 겨울올림픽 개최지 투표를 앞둔 4일 오전(현지시간) 과테말라시티 카미노 레알 호텔에서 열린 후보 도시 프레젠테이션에서 평창의 개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과테말라시티=안성식 기자]

"88 서울올림픽은 한국민에게 희망을 줬고, 우리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오늘 '평창'이 선정된다면 한국을 남북으로 가르고 있는 벽(wall)이 허물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우리의 자손들에게 행복과 평화가 가득 찬 미래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저는 겸손하게(humbly)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이번이 제 생애 두 번째이자 가장 큰 도전(challenge)이라고 생각합니다. 4만5000명의 평창군민과 7000만 한국민과 60억 세계인이 여러분의 결정(decision)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겸손하게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영어로 첫 대외 연설한 이건희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이 무대에 섰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 회장은 5일(한국시간) 과테말라에서 열린 평창의 프레젠테이션에 직접 나서 영어로 이렇게 호소했다. 한국 대표 기업의 총수인 이 회장의 이날 연설은 첫 대외 연설이었다. 물론 영어 연설도 처음이었다. 이 회장은 삼성 임직원들 앞에서 연설을 한 적은 있지만 그동안 대외 연설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삼성 관계자는 "영어.일본어로 사업 논의를 하는 데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외국어에 능숙한 이 회장이지만, 이번 연설은 원고를 읽는 것인데도 수십 번 연습했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평소 "평창의 겨울올림픽 유치는, 일본은 따라잡지 못하고 중국에는 쫓기는 샌드위치 위기에서 벗어나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창 유치를 위해 많은 땀도 흘렸다. 2005년 운동을 하다 다리를 다쳤지만 그해 휠체어를 타고 IOC 총회장에 나와 각국 IOC 위원들에게 평창을 알렸다. 사업상 해외 출장 때도 시간을 쪼개 각국 IOC 위원들을 만나 평창 지지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평창 대사'로 활동했다.

올 2월 평창을 찾은 IOC 실사단을 맞아 직접 현장을 안내했다. 이어 3~4월에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돌며 유치활동을 했다. 4월 말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삼성의 올림픽 후원 조인식 때는 각국 IOC 위원 33명을 초청했다. 겨울올림픽 개최지 선정 투표에 참가한 IOC 위원 중 약 3분의 1을 부른 것이다. '한국 기업이 올림픽을 적극 후원한다'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전략이었다.

이 회장은 또 과테말라 IOC 총회를 앞두고 6월 15일 출국해 브라질.칠레 등 중남미 국가들을 돌며 부동표 잡기에 나섰다. 올 들어 거의 모든 대륙을 누비며 평창 유치활동을 펼쳤다. 이달 초 과테말라에 도착한 이 회장은 3일(현지시간) 한국 기자실을 찾았다. 이 회장이 연단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평생 사업을 하면서 대개 예측이 가능했는데, 이번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는 없었다"며 "끝까지 방심하지 말고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각오를 내비쳤다. 그러나 이 회장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노력한 만큼 아쉬움도 컸기 때문일까. 2014년 겨울올림픽 개최지가 소치라는 최종 발표가 있은 뒤 이 회장은 자크 로게 IOC 위원장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IOC 위원 중 제일 먼저 발표장을 나섰다. 삼성 관계자는 "겨울올림픽이 국가 경제 발전에 큰 보탬이 되는 만큼 2018년 겨울올림픽 유치에 평창이나 다른 지자체가 나선다면 다시 뛰겠다는 것이 이 회장의 뜻"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8일까지 과테말라에서 계속되는 IOC 총회에 참석한 뒤 귀국할 예정이다.

권혁주.임미진 기자<woongjoo@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