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에 실은 '백수 탈출의 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집에만 있지 말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세요."

3일 오후 6시30분 서울 마포구 마포FM 스튜디오에 '선배 백수'를 자처하는 주덕한(38)씨가 마이크 앞에 앉았다. 그는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20대 실업자의 하소연에 적극적인 생활자세를 주문했다. 10여 년 넘게 백수로 지냈다는 주씨는 "백수들의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안다"며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백'(20대의 태반이 백수)을 넘어 '이구백'(20대의 90%가 백수)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청년실업률이 높아지면서 '백수를 위한 방송'까지 처음으로 등장했다. 청년실업네트워킹센터와 백수들의 모임인 '백수연대'가 함께 제작했다.

지역 라디오 방송인 마포지역 FM(100.7MHz)을 통해 매주 화요일 오후 6시30분부터 한 시간 동안 진행될 예정이다. 다음달부터는 방송기술에서 콘텐트 제작까지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인터넷 방송도 시작할 계획이다.

◆"우리들의 목소리를 내겠다"=이번 방송은 전.현직 백수 10여 명이 두 달간 준비한 끝에 시작됐다. 은둔형 외톨이를 대상으로 한 '올 니트 니폰(All NEET Nippon)'이라는 일본 인터넷 방송을 벤치마킹했다.

이 방송은 청취자들의 고민을 듣고 상담해 주는 '치유 프로그램'의 성격이 짙다고 한다. 주씨가 동료들에게 "실업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방송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백수방송도 실업자들을 위한 '희망상담' 코너를 마련했다. 취업 및 창업 소식을 전해주는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실업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저렴한 가격으로 각종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문화 백수'라는 코너도 준비했다.

주씨는 "젊은 실업자들에게는 동정의 시선보다는 용기를 줄 수 있는 독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백수방송을 위해 전파를 빌려준 마포FM의 이웅장 편성국장은 "많은 청년의 백수 탈출에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방송을 허락했다"고 강조했다.

◆"백수 탈출의 핵심은 자신감"=백수방송국의 가장 큰 특징은 기획.취재.리포트.섭외.홍보 등 방송의 전 과정을 실업자들이 한다는 점이다. 돈을 받고 하는 정식 직업은 아니지만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진짜 일'을 한다는 점에서 백수들이 스스로 보람과 자신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실제 이날 방송에 출연한 황정은씨는 지난달 백수 탈출에 성공했다. 3년 넘게 계속됐던 구직을 위한 몸부림이 끝났다고 표현했다.

황씨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면서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선배 백수 입장에서 '집 밖으로 나올 것'을 주문했다. "혼자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황씨의 주장이다.

한애란.권호 기자<gnomo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올 니트 니폰(All NEET Nippon)=2006년 10월 27일 시작한 일본의 인터넷 라디오 방송. 실업자, 은둔형 외톨이 등의 자활을 돕는 일본의 비영리단체인 고토바 노 아틀리에(Kotoba no Atelier)의 후원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창업 및 취업 정보를 제공하고, 청취자들의 사연을 들어 상담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한 달에 한 차례 공개방송과 오프라인모임을 갖는다. 실업자들의 자활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