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물결로 구소 전역서 위기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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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적임따져 정부가 대러 교섭 서둘러야
독립국가연합(CIS) 소속 타지크공화국에서 발생한 내전의 여파로 1만3천명의 현지 한인들이 난민화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구소련권에 거주하는 45만 한인들의 생존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구소련권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유혈 민족갈등이 타지크사태와 같이 악화될 경우 제2의 타지크 한인들이 속출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지역의 극렬 민족주의자들은 아예 구유고연방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이민족 청소」의 불가피론을 들먹이고 있는 실정이다. 흔히 재소고려인으로 불리는 한인들의 생존이 가장 위협받고 있는 곳은 타지크를 비롯,우즈베크·카자흐 등 30만명 안팎의 한인들이 살고있는 중앙아시아 회교권 5개국이다. 중앙아시아 토착민족들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이 주도한 페레스트로이카로 연방정부의 통제력이 느슨해진 80년대 후반부터 종교·문화적 일체감을 바탕으로 공동전선을 형성,본격적인 탈소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90년대 접어들어 독립이 기정사실로 굳어지자 역내 소수민족들에 대해서도 「침략자(러시아인)들의 앞잡이」라는 등의 이유를 붙여 유형무형의 압력을 가하기 시작함으로써 결국 한인들에게까지 불똥이 튀게됐다.
러시아의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지는 이미 91년말 「침묵속에 또다시 압박받는 사람들」이란 기사에서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수난사를 일일이 예거하고 이들이 토착민족들의 텃세에 못이겨 1930년대말 러시아 극동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쫓겨난 것처럼 다시금 유랑의 길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예고한바 있다. 이에 앞서 우즈베크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집 주변에 『93년말까지 우즈베크를 떠나지 않으면 몰살시키겠다』는 내용이 담긴 유인물이 대량살포돼 그곳 한인들을 공포속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같은 현상은 중앙아시아 5개국 정상들이 이달초 CIS의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CIS를 탈퇴하고 가칭 중앙아시아인민연방을 창설하겠다고 공표하는 등 배타적 결속움직임을 강화하고 있어 그곳 한인들의 설 땅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따라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추방되기 이전까지 터잡고 살았던 연해주로 「귀향」한다는 목표 아래 다각적인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89년 5월 결성된 재소고려인협회는 연해주에 한인 자치지역을 건설키로 결정,수차례에 걸쳐 러시아정부의 승인과 한국정부의 측면지원을 요청했다. 이 계획은 한때 현지주민들과의 마찰을 핑계로 연해주정부가 거부하는 바람에 난관에 봉착했으나 러시아 최고회의가 오는 27일 한인들에게 추방전 장소로의 복귀허용을 골자로 하는 「재러시아 한인들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안」을 최종 처리키로 함으로써 재추진의 호기를 맞고있다. 따라서 한국정부의 이들의 염원이 달성될 수 있도록 만반의 대비책을 강구해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구소련 최고회의가 89년 11월 이번 법안과 유사한 결의안을 통과시켰음에도 불구,한국정부의 미온적인 대처와 구소련 해체위기 속에서 끝내 실효를 보지못하고 말았던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더욱이 연해주정부와 인근 하바로프스크지방정부도 그동안의 태도를 바꿔 집단이주가 아닌 개별이주 형태로 한인들의 유입을 받아들이겠다고 재소고려인협회 등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강제이주·탄압 등 소수민족으로서의 설움을 톡톡히 겪고서도 이념과 체제의 장벽 때문에 근 50년동안 우리의 관심권 밖에 방치돼온 재소고려인들이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는 민족이기주의의 제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한인들 스스로의 노력 못지않게 한국정부의 적절한 역할에 달려있다는 것이 한결같은 지적이다.<정태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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