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회색 정장, 다시 남자품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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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빛 정장의 향연

 남성복의 대표 주자는 정장용 수트다. 올 밀라노에선 ‘회색의 변주’가 눈에 띄었다. 셔츠·구두·벨트·타이까지 모든 아이템을 흰색 또는 검정으로 스타일링한 것도 등장했지만 회색 계열의 강세가 가장 두드러졌다. 보테가 베네타의 수석 디자이너 토마스 마이어는 자신의 작품 의도를 설명하면서 “돌의 색깔부터 시멘트색까지”라고 표현했다.

 실제 패션쇼 무대에서 회색 수트는 언뜻 보면 흰색으로 보일 만큼 아주 옅은 것에서부터 쥐색에 가까운 짙은 것까지 폭넓게 연출됐다. 같은 회색이라도 광택 있는 소재로 표현을 달리한 것도 많았다.

 흔히 ‘더블’이라고 불리는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도 여러 브랜드에서 소개됐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살바토레 페라가모·로베르토 까발리·베르사체·보테가 베네타·발렌티노 모두 이런 형태의 수트를 선보였다. 다만 앞 단추는 두 개짜리 전통적인 형식을 살린 것과 한 개로 다소 가볍게 표현한 것이 있었다.

 AP통신의 패션 담당 기자인 다니엘라 페트로프는 “이번 컬렉션엔 정장용 수트가 예전보다 많이 등장했다”며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남성들을 성장(盛裝)시키려 한다”고 평했다.

 수트가 많아진 만큼 디자이너들은 라펠(재킷·코트 등의 접은 옷깃)에 멋 내기 방점을 찍었다. 평소보다 넓히거나, 좁히는 등 갖은 변화를 시도했다. 돌체&가바나·엠포리오 아르마니 등은 3㎝ 안팎의 폭 좁은 라펠을, 구찌는 큼직한 체크무늬가 도드라진 넓은 것을 선보였다.

 #여름 샌들에 웬 양말?

 컬렉션에선 ‘무엇을 입느냐’ 못지 않게 ‘어떻게 입느냐’를 주목해야 한다. 옷도 옷이지만 입는 방식, 즉 스타일에 따라 옷의 품위·맵시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들은 정성껏 준비한 작품들을 소비자들이 최대한 입고 싶게끔 표현한다. 또 그게 하나의 유행으로 떠오르곤 한다.

 올해 특기 사항은 수트 재킷이 캐주얼 아이템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이어진 경향이지만 특히 이번 컬렉션에서 정장용 재킷으로 멋을 부린 작품이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일례로 돌체&가바나는 깔끔한 검정 턱시도 재킷에 은빛 장식이 요란한 진을 조합시켰다. 또 여기에 맨발 차림의 샌들을 곁들였다. 정장과 샌들의 만남이 파격적이다. 일종의 역발상에 가깝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발목 위로 살짝 치켜 올린 트레이닝복 형태의 바지와 점잖은 재킷 수트 스타일을 선보이기도 했다.

 여름 패션의 필수품 중 하나가 샌들이다. 밀라노에선 프라다의 샌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많은 브랜드들이 투박하다 싶을 정도로 스트랩(끈)이 두꺼운 샌들을 내놓았는데 그중에서도 프라다의 스타일이 압권이었다. 패션 전문가는 물론 일반인 사이에 일종의 금기와 같았던 ‘샌들에 양말 신기’를 시도했다.

 특히 프라다의 수석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는 중국풍 실크 느낌의 셔츠와 통 좁은 바지에 와인색·카키색의 양말을 신은 샌들을 매치시켰다. 프라다 특유의 선 가는 의상에다 양말을 갖춘 샌들 차림의 가녀린 체구의 소년 모델들이 이채로웠다.

 여름 패션의 파격은 목도리에서도 부각됐다. 남성용이든 여성용이든 머플러는 이제 사계절용 아이템으로 정착된 모양새였다. 돌체&가바나는 수트는 물론 삼각 수영복을 입은 모델에게도 두툼한 흰색 머플러를 씌웠다.

 #더욱 두드러진 계절 파괴

 캐주얼 의상에선 다채로운 색감이 눈에 띄었다. 디스퀘어드·프랭키 모렐로 등은 가죽 소재의 블루종 재킷과 빨강·파랑·노랑·핑크 등 유쾌한 색깔로 재미난 의상을 내놓았다.

 화려한 색상은 정장에도 적용됐다. 핑크색 수트를 선보인 보테가 베네타가 대표적 사례다. 이번 컬렉션에서 무채색 스타일링을 강조한 마르니의 수석 디자이너 콘수엘로 카스틸리오니조차 푸른빛 짧은 반바지로 ‘색상의 퍼레이드’에 동참했다. 반바지는 허벅지 중간쯤 오거나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게 많이 보였다.

 봄철 재킷에 얇은 송아지 가죽을 쓴 것도 많이 띄었다. 반바지 또한 가죽 소재가 드물지 않았다. 겨울 의상에 주로 쓰였던 가죽이 봄·여름 의상에도 파고든 것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패션 전문기자 수지 멘키스는 이런 경향에 대해 “이제 패션은 더 이상 특정 시즌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봄·여름은 물론 다른 계절에도 입을 수 있는 옷이 이제 낯설지 않다는 평가다. 더욱 가팔라진 퍠션의 ‘계절 파괴’를 보여준 밀라노 컬렉션이었다.

밀라노=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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