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국산화 이전엔 가보로 대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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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금은 한번 쓰고 버리는 제품까지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카메라는 가보에 오를 만큼 귀중품이었다.
일제 캐논 카메라 한대가 20만∼25만원으로 1인당 GNP 4백 달러(16만원선)를 훨씬 웃돌 정도였으니 대개는 장롱 깊은 곳에 고이 모셨다가 연중행사로 가끔씩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때만 해도 일반 가정에서는 카메라는커녕 사진조차 귀해 온 집안 사진을 액자에 한꺼번에 넣어 안방에 보란 듯이 걸어 놓는 게 무슨 유행 같았던 시절이었다. 카메라의 어원인 라틴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어두운 방」이란 뜻으로 이미 고대그리스시대 때 쓴 광학기법이란 기록이 있다.
1831년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가 노출광선을 준 은 판을 우연치 수은병과 함께 진열장에 넣어 두었다가 수은의 증기로 사진현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1839년 처음으로 카메라를 만들어 낸 것이 직접적인 기원이다.
카메라 산업은 19세기 말 본격화되어 금세기 초까지 미국이 주도했고 이어 독일이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면서 명품 라이카 카메라를 내놓아 선두에 나섰으며 그 다음 독일에 동맹을 맺어 주는 조건으로 카메라기술을 전수 받은 일본이 피나는 노력 끝에 2차대전후 독일을 딛고 일어서게 됐다.
특히 일본은 50년대 말부터 경박 단소 기질을 여지없이 발휘한 중저가 카메라 개발에 열을 올려 지금은 세계시장의 90%(해외생산 분포함)를 차지하는「카메라 제국」이 됐다. 우리 나라 카메라 역사는 이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1884년 일본에서 사진기술을 배워 온 지진영 씨가 종로 단성사에 사진관을 연 데서 비롯된다. 초기에는 대형카메라의 마그네슘 폭발음과 섬광에 혼비백산하기 일쑤였던 일반대중들도 20년대 들어 언론에서 독일제 소형카메라를 흔히 쓰자 차츰 카메라에 익숙해졌다.
50년대에는 미군의 PX유출 품이 나돌더니 60년대 월남전 참전용사들이 귀국 때 들여오는 필수품목으로 꼽히면서 카메라 보급은 확산 일로를 걷는다. 우리 카메라 산업이 태동한 것도 이때부터.
국산품애용을 내건 박정희 대통령은 시중에 만연한 일제카메라에 자주 개탄했고 재계의 거물이었던 이정림 대한양회 사장(2, 3대 전경련회장·작고)이 이에 자극 받아 67년 구로 공단에 대한광학을 세웠다. 6천6백 평 공장을 가진 이 회사는 출발부터 구로 공단 최대업체로 화제를 모았다.
초기에 쌍안경을 생산하던 대한광학은 69년 일본 마미야사와 제휴,「마미야또B」라는 일제카메라를 대 당 25달러에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한때 재미를 봤던 이 회사는 그러나 조잡한 품질로 클레임이 밀려들어 72년 손을 들고 말았다. 일제부품과 사출기를 썼지만 기술이 없어 작은 충격에도 케이스나 렌즈가 쉽사리 깨지는 형편이었다.
대한광학은 75년 정책배려를 업고「코비카 카메라」를 군납하면서 재기를 노렸으나 일제 밀수카메라를 당하지 못하고 83년 도산했다.
비슷한 시기에 고려광학이 3만원 대「밀록스 카메라」로 진출했으나 역시 재미를 못 봤다.
카메라가 국산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은 80년대부터다. 79년 일본 미놀타 사와 기술제휴로 첫 모델「하이매틱스」를 내놓은 삼성항공이 75년 초점이 자동 조절되는 AF(오토 포커스)카메라를 독자개발하자 아남·동원 등 이 뛰어들었고 금성·현대 등이 가세,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 같은 경쟁에 따라 부품국산화비율은 50%수준까지 높아졌다.
그러나 명색이 세계 2위인 우리 카메라 산업의 현황은 결코 밝지 못하다. 내수부진으로 아남정밀·삼양광학 등 큰 업체들이 좌절을 맛보았고 기술개발 또한 중저가품목인 AF카메라에만 매달릴 뿐 고급품인 매뉴얼 식 카메라는 일본에 밀려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이웃은 필름 없는 카메라까지 실용화하는 단계인데 반해 우리는 내수시장규모가 올해 7백억 원으로 지난해보다 줄어들 전망인 와중에서도 렌즈·셔터 등 비싼 기초부품을 여전히 수입에 의존하는 어두운 실정이다. <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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