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교묘해지는 TV프로 베껴 먹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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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지난해 문단을 강타한 표절시비의 와중에서 우리에게 익숙해진 용어가 있다. 혼성모방이라는 말이다.
예술작품의 부분 부분을 표절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방식을 가리키는 이 낱말은 서구의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창작의 한 형태로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창작보다는 표절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혼성모방을 창작으로 인정하지 않는 평자들은 원작자가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 낸 에센스만을 골라 짜깁기하는 행위를 새로운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농사는 짓지 않고 열매만을 따먹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행위를 창작으로 인정한다면 자신만의 독특한 형식미를 창조해 보겠다는 예술적인 열정은 모두 파괴당하고 말 것이라고 우려한다.
우리나라 TV프로가 외국프로의 포맷을 베껴 온 것은 하루 이틀 새의 일이 아니다. 프로그램 개발에 많은 자본과 인력을 투자하고 있는 외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에 있으면서도 프로의 질을 유지해야 하는 우리 제작진들로서는 이러한 외국프로 모방은 불가피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베껴 먹기는 현재방송중인 국내 다른 채널의 포맷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패러디화해 방송사간의 감정대립으로 발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10일 방송된 MBC-TV의『일 요일 일요일 밤에』는 영화배우 문성근을 소개하면서 현재 SBS-TV에서 방송중인『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방식을 그대로 모방한「그것을 알려주마」코너를 만들어 개그맨 이경규가 문성근을 흉내내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것을 알려주마」코너는 이전에도『남의 방송사 인기프로를 비아냥거린다』는 SBS측의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MBC측은 SBS가「몰래 카메라」를 그대로 베껴「꾸러기 카메라」를 만든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사실 SBS측의 포맷 베끼기는 더 노골적이다. MBC-TV가 외국프로를 베껴 만든「몰래 카메라」코너가 인기를 끌자 SBS는 같은 시간대에 똑같은 포맷의「꾸러기 카메라」를 만들어 지금까지 써먹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유행하고 있는 베껴 먹기는「꾸러기 카메라」처럼 포맷자체를 그대로 베끼기보다는 기존의 인기코너를 패러디 화하는 방법으로 좀더 교묘하게 이뤄지고 있다.
예컨대 10일 오후『일 요일 일요일 밤에』프로그램이『우정의 무대』의「그리운 어머니」코너를 빌려 연예인 가족 찾기를 한 것과「그것을 알려주마」는 대표적인 경우다.
시청자단체들은 이런 식으로 인기프로의 포맷을 패러디 화하는 것에 대해『표절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고 남이 애써 개발한 포맷의 인기를 손쉽게 가로채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고려대 원우현 교수(언론학)는 이에 대해『인기 영화 등을 패러디 화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아이디어로 볼 수 있지만 2차 가공에 의존하는 제작풍토는 다양한 새로운 프로의 개발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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