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무기 공포”벗기 큰 걸음/파리 「국제금지협정」서명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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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강력한 사찰·검증제로 군축에 새장/소극적인 북한에 큰 압력 작용 예상
화학무기금지협약(CWC) 서명식이 13일 한국을 비롯한 1백17개국이 참석한 가운데 파리에서 열려 화학무기 폐기를 위한 국제적인 노력이 구체화 되고있다.
이 협약은 최소한 65개국이 비준서를 기탁한후 1백80일 이후,서명개방후 최소한 2년 경과후 발효토록 돼있어 현재의 호응도로 볼때 95년부터는 발효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화학무기는 무차별 대량학살 무기로 필요 이상의 고통을 주는 잔혹한 무기라는 점에서 국제여론의 비난을 받아왔다. 특히 대량의 화학무기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핵무기 이상의 위협요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비인도적 성격 때문에 1874년 브뤼셀선언에서 「독소」사용을 금지한 이후 1899년의 질식가스를 금지한 헤이그협약이 잇따랐다. 그러나 1차대전 당시 독일이 염소가스를 사용,화학무기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이에 따라 1925년 질식성,독성 또는 기타 가스 및 세균학적 무기 등 비인도적 생화학무기의 전시사용을 금지한 「제네바의정서」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이 제네바 의정서는 무기의 개발·생산·비축 및 배치를 규제하고 있지 않을뿐 아니라 의정서 위반에 대한 제재조치나 그 절차규정이 없어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네바 군축회의 화학무기 특위에서 마련된 이번 협약은 핵무기의 확산을 규제하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이상으로 실효성을 보장하고 있다는데서 주목을 끌고있다. 이 협약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에 대해서는 무력한 NPT와는 달리 기존의 화학무기와 그 생산시설도 10년 내에 모두 폐기토록 함으로써 지구상에서 화학무기를 완전히 추방토록 하고있다.
더군다나 CWC는 강제사찰 등 강력한 검증제도를 채택함으로써 협약의 성실한 이행을 확실히 보장하고 있다. 일방당사국이 요청하면 집행이사회가 4분의 3 이상의 다수결로 반대하지 않는한 강제사찰을 실시해야 한다(제9조). 또 협약위반국에 대해서는 당사국 총회에서 국제법에 따라 집단조치를 권고하고,사안이 중대할 경우 유엔총회 및 안보리의 검토를 요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제12조).
이 강제사찰 제도는 새로운 군사 검증제도의 확립이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번 파리서명식에서는 1백17개국이 원서명국으로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지만 북한 및 이라크·리비아 등 중동지역 대부분의 국가가 불참할 것이라는 예상은 협약의 실효성과 관련해 중대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NPT 미가입을 이유로 이 협약에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중동국들은 대부분 다량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최근까지도 화학무기를 실제 사용한 전례가 있는 이라크를 비롯한 이들 국가 모두가 협약에 가입하기 전까지는 「빈자의 핵무기」로 일컬어지는 화학무기의 위협이 완전히 제거된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우리가 이 화학무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북한이 「화학무기의 강국」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북한이 1천t의 화학무기를 비축하고 연5천t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확한 비축량은 확실하지 않지만 북한이 상당량의 화학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CWC가 정식발효되면 이것은 북한에 대한 새로운 압력수단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정부는 CWC의 서명·비준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이 협약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집행이사회에 진출할 방침이다. 집행이사회는 41개 회원국으로 구성되며 이중 16개 의석은 주요화학산업국에 배정하게 돼있어 사실상 상임이사국이 된다. 한국은 생산액 기준으로 사회주의국을 제외하고 세계 8위,수출액을 중심으로 세계 10위의 화학국임을 내세워 이 「주요화학산업국」자리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있다.
정부는 앞으로 아직 이 협약의 체결을 원칙적으로만 지지했을뿐 구체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북한을 이 협약에 가입토록 적극 유도키로 했다. 북한은 이번 서명식에 아예 불참해 상당기간 가입을 보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상옥외무부장관은 이번 파리에서 중국·러시아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도 이와 관련한 협조를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도 14일 오전 서명할 예정이지만 일단 비준만은 북한의 CWC 가입에 연계해 신중히 검토해 나갈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자칫하면 핵문제에 이어 남북대화의 새로운 장애요소로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정부는 이미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도 않고,생산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바 있어 특별한 조치는 필요없다. 규제물질과 관련한 화학공장들에 대한 사찰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화학무기 생산과 관련이 깊은 정밀화학 분야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있다. 국내 화학산업은 화학섬유·석유화학·고무·플래스틱 등 일반 화학제품이 70%를 넘는 취약성을 갖고있다. 따라서 엔지니어링 플랙스틱·기능성 고분자 등의 고부가가치 제품과 정밀화학 분야 등 중간재·원재 등 기술집약적인 제품보다는 단순가공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협약과 관련한 기술통제의 강화는 신소재·정밀화학 분야로 전환하는데 상당한 장애가 될 가능성이 있다. 또 수출입 통제에 따라 국제화학제품의 가격상승도 우려되고 있다.<파리=김진국·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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