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이구택 포스코 회장의 ‘전문경영 실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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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18면

포스코의 이사진 15명 중 사내이사는 현재 3분의 1을 겨우 넘는 6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9명은 경영인ㆍ교수ㆍ컨설턴트 등이다. 지난해부터 이구택(61ㆍ사진) 회장이 함께 맡아오던 이사회 의장 자리를 사외이사에게 내놓았다. 경영은 경영진이, 감독ㆍ견제는 이사회가 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1년 임기인 의장은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에 이어 현재는 김응한 미시간대 석좌교수가 맡고 있다. 이사회 운영도 여느 기업과는 다르다. 경영진이 제출한 안건에 대해 문제 제기와 토론이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지난 2월 이 회장의 연임을 결정한 CEO추천위원회는 오후 2시부터 밤 9시까지 진행됐다. 이 회장이 단독후보였지만 그동안의 실적과 능력을 하나하나 재평가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선 “이 회장의 리더십과 전문성은 좋지만 좀 더 공격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문제제기도 잇따랐다.

“기아처럼 되지 말자” 다짐 또 다짐

사외이사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이사회를 주도하는 이 같은 지배구조는 회장 선임 때마다 불거진 외풍 논란을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렇다고 그가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 회장은 2004년 3월 미국에서 기업설명회를 하며 “기업의 장기 성장보다 단기 업적에만 관심을 갖는 월가의 논리는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월가의 투자자들은 포스코가 설비 유지에만 연간 1조원 이상을 쏟아붓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포스코가 세계 철강업체 중 최고의 수익률을 낼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설명이다. ‘지배구조가 좋으면서도 꾸준히 성장하는 좋은 회사’가 그의 목표다.

한국 증시 지수가 처음 1000을 넘어선 1987년 정부는 우량주를 공급한다는 명분으로 포스코(당시 포항제철) 민영화를 추진했다. 장외에서 대주주를 물색해 대량으로 지분을 넘기고 나머지를 나눠 파는 블록세일로 이른바 ‘주인 찾아주기’ 방식이었다. 공기업 인수가 곧 특혜를 의미하던 시절이었던 만큼 여러 대그룹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었다. 이 중 한 그룹의 임원이 사석에서 포스코의 경영정책부장을 만나 탐색전에 나섰다.

“포스코를 우리가 인수할 생각인데 협조해 주세요.”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영정책부장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림없는 소리 마시오. 포스코가 어떤 회사인데 댁들에게 넘긴다는 말이오.”

그 뒤 꼬박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경영정책부장이 바로 현재의 이 회장이다.
그에게 포스코는 단순한 회사가 아니었다. 그는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1969년 포스코에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영일만의 모래밭에 콘크리트를 쏟아부으며 제철소 건설에 참여했고, 이후에도 줄곧 엔지니어로 현장을 지켰다.

창립멤버들에게 세계적인 제철소를 키워냈다는 자부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오너 없는 기업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오기가 생겨났다. 당시 박태준 회장 등 전 임직원은 “선열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회사가 특정 기업의 손에 들어가면 나라 경제 전체에 주름이 진다”며 정부와 여론에 블록세일 방식의 매각 반대를 호소했다. 결국 정부는 지분 51%를 남겨두고 개인이나 법인에게 1% 이하로 지분을 분산하는 방식으로 포스코를 민영화했다.

이 회장은 2003년 초 포스코 사상 처음으로 ‘외풍 논란’이 없이 선출된 CEO가 됐다. 포스코는 물론 포스코건설ㆍ포스데이타 등 자산규모 9위에 해당하는 기업집단의 선장이다. 20년 전 그가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은 어떻게 됐을까.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정답이다. 포스코는 국내 대기업 사상 처음으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회사로 자리를 잡았다.

이 같은 경영실험에 힘을 불어넣는 건 탄탄한 실적이다. 2002년 11조7000억원이던 매출은 지난해 20조원을 돌파했다.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두 배와 세 배가 됐다. 49.1%이던 부채비율은 21%로 뚝 떨어졌다. 주가는 10만원에서 40만원대로 껑충 뛰어올랐다. 증권가에선 포스코가 2분기에 1조1500억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기록, 삼성전자를 제치고 가장 돈 잘 버는 회사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걱정거리도 적지 않다. 이 회장은 지난해 “외국 경쟁업체가 인수합병(M&A)을 시도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했다. 철강업계는 지난해 세계 1, 2위 인 미탈과 아르셀로가 합병하는 등 격변기에 들어서 있다. 외국인 주주가 전체 지분의 62.7%(2006년 말 현재)에 달하는 포스코로선 걱정이 안 될 수 없다. 국민연금ㆍ우리은행 등 국내 우호주주에 대한 주식 매수 요청으로 우호 지분율을 40% 안팎까지 끌어올리긴 했지만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 그는 이에 대해 “‘충분하다’고 할 순 없지만 ‘아주 미흡하다’고 볼 수도 없다”고 평가했다. 해외 투자의 핵심인 인도 오리사주 제철소가 지연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모두 12조원이 투자되는 인도 제철소는 당초 지난 4월 첫 삽을 뜰 예정이었지만 토지보상 등의 문제로 오는 10월로 연기됐다.

하지만 그의 최대 관심사는 따로 있다. 바로 ‘윤리 경영’이다. “회사 이익과 윤리가 부딪치면 윤리를 선택하라” “능력에 문제 있는 사람과는 함께 갈 수 있어도 윤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과는 함께 갈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취임한 직후인 2003년 6월엔 윤리규범을 만들어 직원들의 신분증에 새겨넣었다. 여기엔 ‘상을 당했을 때 언론에 부고를 내지 않는다’ ‘탈세ㆍ회계부정ㆍ환경오염 등 위법행위가 있는 회사와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등 국내에서 다소 생소한 항목까지 담겨 있다. 해마다 10명 안팎이 이를 어겨 해고된다. 그가 윤리를 이처럼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회사의 사활이 달린 문제”라는 게 그의 대답이다. 대주주가 없는 회사에서 윤리적 문제가 터지면 자신은 물론 회사마저 휘청거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감도 한몫을 한다. 포스코는 대주주가 없는 국내 기업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그는 직원들에게 종종 “‘제2의 기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주들의 자산을 잘 관리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이 회장이 경기고에 다니던 때. 국어선생님이 그의 한자이름(龜澤)으로 농담을 건넸다. “거북이가 연못에 산다니 자라밖에 더 되겠느냐.” 이 회장은 정색하고 “거북이가 살 만한 연못이면 더 좋은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지난 40년간 이 회장은 자신이 자라가 아님을 입증했다. 포스코를 더 키워 ‘호수’로 만들고 스스로를 거북이보다 더 큰 존재로 만들어 나가는 것은 앞으로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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