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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과주말을] 아직 희망이 있다면 삶은 끝나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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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일분 후의 삶

권기태 지음, 랜덤하우스,
275쪽, 9800원
  
 건너 들은 얘기 중에 교통사고 체험기가 있다. 어, 어 하며 충돌하기 0.1초 직전, 그 찰나에 인생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단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저 깊은 곳에 묻어있던 기억의 장면장면이 휘리릭 스쳐간단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싶으면서 잠깐 정신을 놓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 책은 그보다 백배는 더 극적인 죽음의 위기를 이겨낸 열 두명의 경험담이다. 대학생 실습 기관사가 꿈에 부풀어 탄 유조선이 폭발했고, 새 집을 짓고 기뻐하던 중년의 가장은 태풍에 강물로 떠내려갔다. 도시라고 안전하진 않았다. 평소처럼 회식자리 한잔에 취해버린 회사원은 걸음 한발을 잘못 디뎌 맨홀 아래 지하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더 위험천만한 경우도 있었다. 아내와 중국여행을 다녀오다 비행기가 추락한 사람도있었고,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강에 빠져 심폐소생술이 아니었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뻔한 소년도 있었다. 누군가는 바위도 깰만큼 강한 2만2900볼트에 온몸이 감전됐다. ‘죽음은 한 순간’이라는 말이 꼭 맞았다. 불과 1분 전까지 그 누구도 자신들이 겪을 생사의 갈림길을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도 그들은 살아났다. 공통적으로 생존의 의지가 남달랐다. 삶의 극한에서 믿을 건 자신 뿐이었다. 영하 20도 바다에 빠져 기운이 빠져가고 산사태로 진흙더미에 묻혀 몸을 일으키기 힘들어도 의식을 놓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집중력으로 버텼고 끊임없이 가족을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사고 소식을 접하며 책을 읽었다. 사실감이 한층 살아났다. 책 속의 인물들은 이제는 털어버린 과거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예상 못하는 죽음의 순간들은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고 있었다. ‘일분 후의 삶’은 곧 두려움이었다.

그래도 용기낼 만한 구절을 찾았다. “희망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거짓말일 때가 있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면 죽을 수 밖에 없을 때 선택할 일은 오직 하나다. 그 거짓말이 현실이 되도록 사력을 다하는 것. 사람은 힘이 없을 때 죽는 게 아니다. 가망이 없어서 죽는다.”

기자 출신의 작가가 ‘취재’를 바탕으로 쓴 글이라 현장감과 글맛이 잘 어우러져 있기도 하다.

이도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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