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물로 빚어진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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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물로 빚어진 사람’ -김선우(1970- )

월경 때가 가까워오면

내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네

깊은 우물 속에서 계수나무가 흘러나오고

사랑을 나눈 달팽이 한 쌍이 흘러나오고

재 될 날개 굽이치며 불새가 흘러나오고

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의 발등엔

늘 조금씩 바다 비린내가 묻어 있네

무릎베개를 괴어주던 엄마의 몸냄새가

유독 물큰한 갯내음이던 밤마다

왜 그토록 조갈증을 내며 뒷산 아카시아

희디흰 꽃타래들이 흔들리곤 했는지

푸른 등을 반짝이던 사막의 물고기떼가

폭풍처럼 밤하늘로 헤엄쳐 오곤 했는지

알 것 같네 어머니는 물로 빚은 사람

가뭄이 심한 해가 오면 흰 무명에 붉은,

월경 자국 선명한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기우제를 올렸다는 옛이야기를 알 것 같네

저의 몸에서 퍼올린 즙으로 비를 만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이야기

월경 때가 가까워오면

바다 냄새로 달이 가득해지네


인간의 몸엔 약 100조 개의 세포가 있다. 남녀의 X와 Y 성염색체가 어떻게 섞이느냐에 따라 성이 갈리고 ‘나’라는 자아가 생긴다. 계수나무가 나오지 않으면 월경이 멈췄다는 뜻. 월경을 한다는 건 생명을 잉태하지 않았다는 뜻. 언제든 잉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빈 몸. 여자의 발등에 묻은 갯내는 통제된 미학이다. 월경은 생명을 낳는 여성의 신성한 출혈이고. 한여름 속에서 이 출혈은 아린 바닷내를 풍긴다. <고형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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