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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 공안부장-체제수호 앞장서는 "검찰의 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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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흔히 체제수호의 야전지휘관으로 비유되는 전국의 공안검사들을 총지휘하는 대검공안부장은 검찰 내에서 노른자중의 노른자 보직이다.
대검 공안부장은 대형 금융 사고나 비리에 대한 수사를 지휘·감독하는 중수부장과 함께 검찰조직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지만 전국 1백여 일선 공안검사들로부터 모든 상황을 일상적으로 보고받고 적절한 지시를 내려야 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정권의 정통성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절 민주개혁을 요구하며 저항하는 반체제세력을 독재권력을 대신해 대량으로 사법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권의 파수꾼」이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던 불행한 과거사도 아픈 상처로 간직하고 있다.

<처리업무 포괄적>
대검공안부의 업무 범위는 대공·정치·학원·재야·노동분야의 반 국가·체제사범에 대한 동향파악·단속 등 대단히 포괄적인 것이 특징이다.
특히 선거사범에 대한 단속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검공안부가 마련한 원칙과 지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이뤄지게 되며 거의 전 과정이 언론에 의해 국민들에게 공개되므로 대검공안부의 역할이 그 어느 분야보다도 중시된다.
이번 선거에서는 검찰의 편파수사가 선거쟁점으로까지 등장하기도 했지만 대검공안부는 공정한 입장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다. 대검공안부가 탄생한 것은 검찰이 관계규정에 따라 공안부를 비롯, 총무부·검찰사무부·공판부·송무부를 설치하고 중앙수사국을 특별수사부로 개편한 73년1월25일. 그러나 그 보다 훨씬 이전인 61년4월9일에 발족된 중앙수사국이 공안분야업무까지 처리했던 만큼 이를 사실상 공안부의 전신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중앙수사국은 49년12월20일 검찰청 법이 제정되고 51년10월20일 중앙수사국 사무규정이 공포된 이래 수차례 설치가 논의됐으나 빛을 보지 못하다 민주당정부의 출범이후인 61년4월9일 발족됐다.
현재의 대검공안부는 공안기획담당관과 공안 1, 2, 3, 4과로 구성돼 있으며 공안 4과장을 제외한 나머지 담당관·과장은 고등검찰관으로 보직된다. 공안1과는 재야단체 등에 대한 정보수집·보고 및 보안관찰처분 지휘·감독 등 업무를 관장하며 공안2과는 선거·의사·노동·정치단체 관련 사전, 공안3과는 학원 및 종교관련 사건, 공안4과는 공안자료수집·보관·관리를 맡는다. 이밖에 공안기획담당관은 공안업무 기획 및 수사지도·분석, 공안관련 출판물·유인물 분석·평가 등 사항을 관장한다. 검사장 급이 기용되는 대검 공안부장 자리에는 지금까지 모두 11명이 거쳐갔고 현재는 고시 15회인 변재일 부장이 제12대 공안부장으로 재임중이다.
대검공안부가 본격적으로 각광을 받고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각종시국사건이 빈발한 5공에 접어들어서 이며 특히 이창우·최상엽씨 등 두 부장에 이르러 오늘날의 면모를 갖췄다는 것이 중론이다.
초대 공안부장인 설동훈씨(고시1회)는 1년7개월간의 재임기간 중 김대중씨 납치사건(73년 8월)에 대한 서울지검의 수사가 단서조차 잡지 못해 곤욕을 치렀다.
처음이자 마지막 호남(광주)출신 대검공안부장인 그는 이후 법무부 기획관리실장·광주지검장·대검 공판부장을 지내다 79년부터 변호사로 개업했다.
2대 강우영씨(고시1회)는 초대 대검특수부장을 지내다 자리를 옮겨 74년9월부터 재임해 이렇다할 시국사건은 겪지 않았지만 자료의 정비와 기재의 과학화에 힘쓰는 등 기틀을 잡았다.
강씨는 전주지검장·서울지검장을 거처 81년 대법원판사로 발탁됐으며, 84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거쳐 86년 공직에서 불러나 변호사개업중이다.
3대와 5대 두 차례에 걸쳐 중책을 맡은 김태현씨(고시3회)는 수원·부산지검장을 역임한 뒤 80년 변호사개업을 했고 대검특수부장에서 자리를 옮겨 앉은 4대 한옥신씨는 79년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뒤 작고했다.

<용공조작에 제동>
6대 박준양씨(고시5회)는 재임기간 중 YH사건(79년8월) 발생직후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검찰·내무부·문공부·노동청 등 유관기관 합동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 단장으로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박씨는 이때 유신 말기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관련자들을 용공으로 몰고 가려는 대세를 단호히 거부, 『비록 의식화는 됐지만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은 아니다』라며 제동을 걸고 이를 관철시켜 내부적으로 화제가 됐었고, 80년 광주사태 때에는 일반통신수단이 두절된 상태에서 검찰통신만으로 상황을 지휘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대구지검장·대구고검장을 역임하고 82년 감사위원을 지낸 뒤 84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계엄령과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유신체제하에서 중앙정보부의 공작업무에 밀려 이렇다할 역할을 할 수 없었던 대검공안부가 서서히 힘을 갖기 시작한 것은 7대 정치근씨 때부터다.
고시8회의 선두주자였던 정씨는 서울지검공안부장을 지낸 첫 대검공안부장으로 81년 2월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선거, 3월 11대 국회의원선거를 치렀고, 부산지검장·검찰종장·법무부장관을 차례로 지내 공안부장이 소위 「잘 나가는」자리로 통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뒤를 이어 81년 4월부터 8대 공안부장을 역임한 이창우씨(고시10회) 는 평 검사시절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동백림 사건(67년 7월)을 처리했고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거친 정통 공안통. 대쪽같은 성격의 원칙론자인 그는 전 민학련 사건(81년 9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82년 3월) 등 시국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강경 일변도인 안기부 측과 잦은 마찰을 빚기도 했으나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검공안부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씨는 서울지검장으로 옮긴 뒤 외화 밀반출사건 후유증으로 도중 하차했다.
9대 최상엽씨(고시13회)는 82년6월부터 무려 5년간 재임하면서 5공들어 발생한 대부문의 시국사건을 요리했다.
당시 반체제 세력들은 극도로 경직된 체제에 저항해 극한적인 투쟁을 벌여 공안상황은 한마디로 최악이었으나 「온건파」의 기수로서 사건들을 거의 완벽하게 처리했다는 평가다.
주요 사건으로는 광주 미문화원방화사건(82년9월), 대구 미문화원 사제폭탄 폭발사건(83년 9월), 서울대 프락치 사건(84년9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85년5월),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방화(85년11월), 서울대 연합시위(86년2월), 인천사태(85년5월), 부천서 성 고문사건(86년6월), 건대 점거농성사건(86년10월), 박종철군 치사사건(87년1월)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대검공안부의 위상을 확고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장기재직으로 인해 일선 지검장을 거칠 기회를 잃고 곧바로 대검차장으로 승진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10대 정경식씨(사시1회)는 국내 유일의 국가보안법실무해설서인 『신 국가보안법』을 펴냈을 정도로 이론에 밝은 실력파이면서도 사소한 일도 세밀하게 챙기는 실무형 간부로 정평이 나있다.
5공 말기인 87년 6월부터 6공 초기인 89년3월까지 재임한 그는 역사적인 87년 6월 민주화운동 기간과 대대적인 노사분규를 겪고 같은해 12월16일 13대 대선을 치르면서 과도기 공안 상황을 유연하게 처리해 능력을 인정받았고, 청주·대구지검장을 거쳐 부산지검장으로 활약중이다. 그는 김기춘 전 법무장관이 주재한 「부산기관장모임」 참석자로 대검차장으로부터 직접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

<「공안정국」 주도>
11대 이건개씨(사시1회)는 89년3월부터 3년4개월간 공안사령탑으로 있으면서 공안 합수부를 지휘해 문익환 목사·임수경양·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과 김대중 평민당 총재 기소로 이어지는 소위 「공안정국」을 주도했다.
최연소(30세) 시경국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지난해 기초·광역의회 선거와 올해 총선을 치르면서 건국이래 처음으로 사전 선거운동 사범을 단속하고 40%가 넘는 기소율을 기록, 선거분위기를 바로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서울지검장으로 14대 대선도 치른 그는 선거기간 중 편파수사 시비에 휘말리기는 했지만 특유의 추진력을 한껏 발휘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직에 있는 12대 변재일 부장(고시15회)은 공안 통은 아니나 부하 직원들의 의견을 충분치 들어주는 합리적인 스타일이며 결코 무리수를 두지 않는 것이 최대의 장점으로 꼽힌다. <이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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