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초 미 노동자의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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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테렌스 맬릭이란 영화작가는 철학박사에다 교수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30대 초반 대학강단을 박차고 나온 그는 인생의 나침반을 영화감독이란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단두편의 영화로 그는 전세계의 비평가들을 열광시켰다. 80년대 초반 파리로 이주한 그는 다시 침묵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의 신작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보이지 않고 있다. 70년대 중반 미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이 이단아는 말하자면 「영화사의 돌연변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CIC출시)은 그가 1978년에 만든 두번째 작품으로 1910년대 미국 계절 노동자들의 삶과 사랑을 담고 있다.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사람들의 뿌리뽑힌 삶을 그리고있지만 작가는 사회사적인 관심에서 이 소재에 접근하고 있지는 않다.
거칠지만 내성적인 계절 노동자 빌려(리처드 기어 분)와 그와 행동을 같이하는 두 명의 여자들. 이들은 시카고의 철강공장에 흘러들었다가 이내 추수철의 농장지대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는 「운명적으로 예고된」좌절된 사랑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빌리는 두 명의 여자 중 나이가 위인 애비(브룩 애덥스 분)를 사랑하지만 동생처럼 보살펴온 처지다. 나이 어린 린다(린다 만즈 분)는 관찰자로서 내레이터 역할을 한다. 이들 일행이 농장으로 갔을때 불치의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병약한 농장주(샘 셰퍼드 분)를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묘한 삼각 관계가 형성되면서 영화는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이 영화는 우선 그 탁월한 영상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웬만한 2류 풍경화들을 무색하게 하는 밀밭 농장의 장엄한 화면은 「70년대 미국영화 중 시각적으로 가장 뛰어나다」는 평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이 대목은 물론 촬영을 맡은 네스토 압멘드로스의 공이 크다.
전편을 어린 소녀 린다의 내레이션으로 구성한 것도 이 영화에 일종의 신화적인 깊이를 부여한다. 그저 주위의 모든 것들이 경이롭게 보이던 이 소녀는 점차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신적 성숙에 으레 수반되는 고통스러움에 대한 관조적이면서도 진지한 기록이기도 하다.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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