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서 홍콩 미련 못 접자 일국양제 구상으로 돌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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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차 남순강화에 나선 덩샤오핑(가운데 모자 쓴 이)이 딸 덩룽(덩 오른쪽)의 부축을 받으며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중앙포토]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틀림없이 오늘의 홍콩을 자랑스러워 했을 겁니다."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을 그림자처럼 보필했던 막내딸 덩룽(鄧榕.57)이 홍콩 반환 10주년을 맞아 입을 열었다. 25일 공개된 반관영 통신사 중국신문사(中國新聞社)와의 특별 회견에서다.

"홍콩 반환 10주년은 곧 부친 서거 10주년입니다. 1984년부터 부친을 곁에서 모셨던 나에게는 각별한 사건이지요."

덩룽의 별명은 '덩샤오핑 사관(史官)'이다. 그만큼 부친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사람이 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회견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부친의 일화를 자세히 밝혔다. 내용별로 소개한다.

◆ 덩과 홍콩의 인연=부친이 처음 홍콩에 간 것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16세 때였다. 프랑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였다. 당시 부친은 홍콩 내 중국인들이 노예 취급을 받는 것을 보고 치욕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 뒤 지하 활동을 하면서 부친은 여러 차례 홍콩을 다녀갔다. 거리를 훤히 꿰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신중국 건국 뒤로는 한 번도 홍콩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 대조적인 두 차례의 남순(南巡)=건국 이후 부친이 먼발치로나마 홍콩을 다시 본 것은 84년 1차 남순(南巡.중국 남부지역 순찰) 때였다. 초봄이었는데 날씨가 쌀쌀했다. 경제특구인 선전(深?)의 원진두(文錦渡)에서 왜소한 회색 망루에 올라 낡은 창문을 통해 홍콩을 바라봤다. 수행했던 선전시 간부가 "인민들이 자꾸 홍콩으로 탈출한다"고 보고했지만 부친은 물끄러미 홍콩만 바라봤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시 부친은 경제특구 건설에 대한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 초라한 선전과 화려한 홍콩은 부친을 더욱 우울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92년 2차 남순 때는 분위기와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는 이미 홍콩 반환이 결정된 뒤였다. 부친은 선전 황강(皇崗)에 새로 놓은 퉁다오(通道) 대교 위에 올라 홍콩을 바라봤다. 초라한 원진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환경이었다. 부친은 유쾌한 듯 남순 내내 말씀을 많이 했다.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 바로 남순강화(南巡講話: 덩이 중국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고 개혁.개방의 당위성과 추진 의지를 밝힌 것)다.

당시 부친은 동행한 홍콩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97년 홍콩이 조국의 품에 돌아오면 반드시 찾아가겠다. 걷지 못하면 휠체어라도 타고 가겠다. 우리 땅을 걸어도 보고 구경도 하겠다. 이것이 내 유일한 소망이다."

◆ 홍콩반환협상 비화=홍콩 반환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변수와 어려움이 많아 협상이 자주 고착 상태에 빠졌다. 영국이 홍콩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주권을 통치권으로 대신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주권은 포기하지만 통치는 계속하겠다는 얘기다. 이른바 '중국 주권 아래 자치'란 개념이다. 그러나 부친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시대 정신과 정의를 내세우며 상대를 압박했다. 그리곤 일국양제(一國兩制:한 나라에 두 체제)라는 지혜로운 구상을 제시했다. 영국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부친은 홍콩 문제에 온 힘을 다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홍콩에 대한 책과 자료로 가득했다. 정치.경제.군사.사회.법제.지연.국제관계 등 내용도 다양했다. 부친은 반환 협상을 앞두고 이 자료를 탐독했다. 정치국 회의도 수시로 열었다. 홍콩의 간행물을 입수해 최신 동향을 파악했다. 홍콩 인사들의 생각을 알아보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바로 일국양제 구상이다.

반환 협상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 여사를 그의 퇴임 뒤 찾아간 일이 있다. 그때 대처 여사는 "난 당신의 부친을 대단히 존경한다"고 말했다.

◆ 사망 직전의 덩=부친은 생활이 매우 검박하고 단순했다. 그는 뒷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단지 홍콩에 가고 싶다는 소망만 있었다.

97년 2월 세상을 떠난 부친을 대신해 홍콩에 가게 된 우리가 격정을 금할 수 없었던 이유다. 당시 모친은 극히 이례적으로 새 옷을 한 벌 장만했으며, 홍콩에 도착해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덩 유가족의 현황=모친 줘린(卓琳) 여사는 지금 91세의 고령이지만 건강하다. 우리 가족은 부친 생전과 마찬가지로 모두 함께 모여 살고 있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다.

베이징= 진세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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