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평양서 20여 시간 … 북한 핵 장비도 사들이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9년 초 임기가 끝나기 전에 북한이 비핵화를 하면 북.미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라." 21일 전격 방북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평양에서 백악관의 이런 메시지를 전할 것으로 보인다고 워싱턴 소식통이 말했다.

이날 낮 12시30분쯤 평양에 도착한 힐 차관보의 북한 체류 시간은 20여 시간으로 알려졌다. 만 하루도 안 된다. 짧은 체류 시간은 미국이 북한에 단호한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국내의 한 외교 소식통은 "장황하게 여러 사안을 논의하는 게 아니라 양국의 관심사인 핵심 의제를 속전속결로 담판 짓겠다는 의미로도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방북은 2500만 달러 송금 문제를 풀기 위해 무던히 애쓴 힐 차관보에 대한 북한의 감사 표시라는 분석도 나온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북한은 힐 차관보의 방북에 화답해 최소한 영변 핵시설 폐쇄를 앞당기는 성의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이달 중 폐쇄가 완료되면 미국 독립기념일(7월 4일) 직후 6자회담이 재개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또 8월 2일 마닐라서 열리는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을 전후해 6자회담국 외교장관 회의가 열리는 등 2.13 합의 이행이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와 관련, 뉴욕 타임스는 힐 차관보가 북한이 파키스탄에서 구입한 것으로 알려진 핵 관련 장비를 미국이 다시 사들이는 방안을 제안할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구입한 뒤 폐기한다는 것이다.

힐 차관보는 평양에서 6자회담 파트너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을 만나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절차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어 완전한 핵시설 불능화 방안도 거론할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미국의 최종 목표인 비핵화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생각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게 워싱턴 외교소식통들의 분석이다. 이를 위해 힐 차관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싶어하나 성사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년 전부터 힐 차관보 초청 의사를 밝혀온 북한은 이번 초청을 계기로 미국과의 직접 대화 구도를 굳히고 적대 관계를 해소하는 계기로 활용할 것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북한은 힐 차관보에게 핵시설 폐쇄 상응 조치로 테러지원국에서 빼주고, 적성국 교역금지도 풀어줄 것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또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자금 송금 문제 해결을 내세워 '제한 없는 국제금융 거래'를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북한이 핵 폐기 의지를 분명하게 보일 경우 힐 차관보보다 높은 인사의 방북 가능성도 점쳐진다. 김계관 부상이 올 3월 뉴욕에서 힐 차관보를 만났을 때 '북핵 해결의 지름길'로 제시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방북 카드를 꺼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힐 차관보는 18일 서울에서 "연내에 북핵 불능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해 모종의 해법을 고려 중임을 비쳤다. 이와 관련,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27일 방미해 라이스 국무장관과 회담하고 2.13 합의 이행 가속화 방안을 논의키로 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한.미 간에 이미 힐 방북 다음 '카드'를 논의하는 단계임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정용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