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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택 신중한 유권자들/이영자 성심여대교수(유세현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바꾸어야 합니다』『바꾸어야 국민을 무섭게 압니다』는 민주당 김대중후보의 한어린 호소에 관중은 박수를 치지만 후보의 목소리만큼 굳은 결심을 내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1일 오후 4시 과천중앙공원 김대중후보연설회장).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공감을 해도 과연 바꿀 수 있을지. 또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 인상이다. 후보가 내세우는 공약들에 대해서도 군데군데 고개를 끄떡이기는 하지만 그 얼굴에는 왠지 겨울의 찬바람처럼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이것은 공무원이 많다는 과천특유의 정치바람인가,아니면 일반 유권자의 공통된 모습인가. 유세장에 나와 서 있는 군중을 쳐다보며 이들이,아니 연단의 사람들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민주선거」를 앞둔 사람들이 진정한 민주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여건과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여건과 의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그 형식만을 엉거주춤 따를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선거혁명을 일으킨 만큼의 민주정치의 모양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치러지는 선거는 내용과 형식이 각기 따로 노는 놀음에 너무나 많은 국민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 같은 씁쓸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러한 운명을 만들어온 우리 자신이 측은하게 여겨진다.
선거가 결코 축제가 되지 못하는 판에 치마저고리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들을 들러리 세우는 모습은 이중으로 눈에 거슬린다. 이는 마치 민주정치의 집을 짓기 위해 겨우 터를 닦고있는 황량한 벌판에 이에 걸맞지 않게 준공테이프를 끊으려 온 것 같은 옷차림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우선 거부감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선거때마다 여자들을 축제분위기를 내는 장식용으로 동원하는 풍습이 재현되는 것에 대한 심한 불쾌감이 더해진다. 추워서 덜덜 떠는 몸은 요란한 머리와 얼굴치장에 조소를 보내는 듯하다. 이들을 바라보노라면 장식적인 효과는 커녕 도리어 추위가 더 느껴진다. 그러나 아이를 등에 업은 아낙네와 가슴에 아기를 품은 젊은 아빠,회사출장길에 바쁜 걸음을 멈춘 직장인,일하다가 뒤늦게 달려온 동네 아주머니,지역에서 20년간 살아온 주름살 많은 노인 등의 얼굴들은 자못 진지하다. 들뜬 열기는 없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무겁게 느껴진다. 후보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느라 잡담할 틈이 없다. 30여분간의 후보 연설이 이들의 걱정을 덜어주기에는 물론 역부족이다. 그래서 유세장을 떠나가는 발걸음들이 허전하다.
한적해져가는 유세장 뒷구석에 차려진 간이장터 술좌석에 삼삼오오 둘러 앉는다. 소줏잔을 기울이며 무언가 열심히 떠들기 시작한다. 그중 한 좌석에 슬그머니 끼여앉아 얘기를 들어본다.
이 지역에서 꽤 오래 살았다는 중년의 두 남자는 비교적 소신있게 말한다. 경기 지역이 대체로 여당 지지성향을 보여왔듯이 이곳 과천도 그랬지만,지난 총선전후로 이 지역에서는 그러한 성향이 달라지고 있고 그들도 이제 야당중에서 누구를 뽑을 것인가를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지역감정은 과거보다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선택에 중요한 요인이 되지 않는다고 자신하기도 한다. 민주당 김대중후보의 연설을 들으러 온 것도 바로 그러한 망설임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유권자의 망설임을 덜어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요식적으로 선거유세를 때울 것이 아니라 모든 유권자가 적어도 한번은 후보들을 직접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국민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텔리비전 토론은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유권자들은 선거를 결코 정치쇼로 보지 않는다. 적어도 과천에서 만난 얼굴들에서는 정치가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직도 정치에 대한 적지 않은 기대가 숨어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유권자가 명철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은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다. 유권자에게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 역시 민주 정치의 길을 열어야 할 책임을 진 정치지도자들의 의지로부터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를 부추기는 힘의 열쇠는 결국 투표권을 행사하는 그 손 하나하나에 쥐어진 것 아닌가. 그래서 선거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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