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김 필요한 러시아 실체/김석환 모스크바특파원(특파원 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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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당장의 이익 없다고 교류열기 주춤/발전 가능성 높아 장기안목 가져야
서울과 모스크바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존재하고 있다.
그 거리감은 비행기로 10시간30분이나 걸리는 서울∼모스크바간 실제거리에서 느껴지는 것보다 더 멀고 쉽게 메울 수가 없는 듯하다.
최근의 옐친 방한을 앞두고 서울은 모스크바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경제적인 변화의 기류와 분위기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채 러시아 정국의 혼란함을 이유로 옐친이 방한을 취소하지나 않을까 우려했고,모스크바는 그들대로 서울에서 나타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냉정한 관심의 실체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러시아는 한국이 러시아에 대해 비관적인 정보에만 치우쳐 투자 및 교류문제에 소극적이었던데 대해 섭섭함을 표시했지만,이러한 비관적인 한국의 판단에 그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연체이자문제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국은 연체이자와 정치의 혼란함만이 마치 세계에서 제일 큰 영토와 자원을 갖고 있고 핵무기가 있으며 볼쇼이발레와 첨단의 기술력을 갖고 있는 이 나라의 전부인양 러시아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같다.
얼마전까지도 끓어오르던 한국에서의 러시아 붐은 통틀어 2천만달러의 14개 합작기업만을 세우는데 그쳤고,모스크바에 서로 먼저 진출하려 안달이던 기업들은 요즘 주재원 수를 오히려 줄이고 있다.
몇달전에 수교한 중국에 대한 투자가 2억5천4백만달러에 달하고 합작기업수도 2백92개에 달한다는 통계는 한국내에서 식어가고 있는 러시아 붐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3년전만 해도 「소련」이라는 단어만 앞세우면 일반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켜 돈도 벌 수 있었던 소련과의 문화교류도 이제는 세계 최정상급의 예술가와 예술단체를 초청해도 이익은 고사하고 표를 팔기에도 상당히 힘이 든다는 소리들이 나올 정도가 되어버렸다.
한편으론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들떴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실체보다는 환상과 상황에 쉽게 흥분하는 한국인들의 냄비끓는 듯한 구태를 보는 것같다.
한국을 자주 드나드는 한 러시아 기업가는 이런 분위기를 보고 『한국은 소련이 망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러시아가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같다』고 말한다.
이 기업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초창기 한국이 주도해 급속한 접근을 보이던 양국의 교류가 이제는 한국측은 주춤한데 러시아측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 자신들이 안달하던 시절의 어려움은 싹 잊어버린채 졸부의 교만함과 방자함으로 러시아의 실체를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무시하며 천대하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얼마전 옐친대통령의 서울 방문때였다.
양국간 상호협력의 가능성과 잠재성은 크지만 한국이 러시아의 경제개혁에 실질적인 지원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러시아는 잘 알고 있다.
러시아의 언론들이 옐친대통령의 이번 방한을 결산하면서 양국이 더이상 과시용이 아닌,순간적인 이익과 서로의 역할·입장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냉정한 현실적인 판단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서로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협력해나간다면 러시아와 한국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양국은 상대방에 대한 환상과 착각속에서 서로를 불신하게 될 것이다.
『서울엔 러시아에 없는 물건들이 많다.
그러나 모스크바에도 서울에 없는 것이 또한 많이 있다.
우리가 교류를 시작한 것은 서로에게 없는 것을 마치 전부인양 강조하자는게 아니고 서로를 돕자는 것이 아닌가.
러시아는 한국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한국은 러시아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이미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옐친의 방한을 수행했던 한 러시아 언론인의 결론은 되새겨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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