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03)작가 천금성씨 "이용만 당했다"|전두환 대통령 전기「황강에서 북악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진인사」뒤에 반드시「대천명」이라는 순서를 덧붙이는 지혜를 보였다. 엉뚱한 인연이 계기가 되어 행운이나 변고를 만나는 경우도 많다. 드물게는 그 인연이 한 개인을「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하는 수도 있다. 소설가 천금성씨(51)는 이 경우에 속한다.
1980년 5월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됐다.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까지 겸직하고 있던 전두환 중장이 국보위의 상임위원장에 취임했다.

<「조오련 기고」가 인연>
같은 날 오전 계엄사령부는『광주사태로 민간인 1백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1백70명이 사망했으며 민간인 1백27명, 군인 1백9명, 경찰 1백44명 등 3백80명이 다쳤다』고 공식 발표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떨어진 너의 붉은 피…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훗날 프랑스의 샹송「누가 할머니를 죽였나」를 개 사한 운동권가요「오월 가」가 섬뜩하게 묘사한 것처럼 일대참사가 광주 일원을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전국이 괴괴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6월24일 김종필 공화당총재, 이후락·김진만·박종규·이병희 의원 등 이「일신상 사유」로 모든 공직을 사퇴했다. 7월9일에는 장·차관급 38명을 포함해 2백32명의 고급공무원을 숙 정했다는 국보위의 발표가 나왔다.
다른 일들도 있었다. 8월2일에는 칼라 텔리비전이 시판되기 시작했다. 같은 달 11일,「아시아의 물개」조오련씨가 부산과 대마도간 대한해협 53km를 13시간16분10초만에 헤엄쳐 건너는데 성공했다. 천금성씨는 한 일간지의 청탁을 받고「대한남아의 기개를 떨친 조오련 선수」에 대해 원고를 썼다. 신문에 게재된 천씨의 글이 허문도 중정 부장 특별보좌관의 눈에 띄었다. 당시 천씨는 저서출판과 신문소설연재 일로 2년여「육지」에 머무르다가 그해 10월께 다시 외항선 선장으로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문명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전씨가 누군지 몰라>
천금성씨의 회고.
『8월13일 허문도씨가 전화를 해 왔더군요.「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오늘 점심식사나 같이 하자」는 거예요. 허씨는 대학(서울대농대)시절 학보사 일을 같이 했던 선배였습니다. 농대에 수석 입학했던 허씨는 대학졸업 후 신문기자가 되었고, 나는 나대로 원양어선을 타고 10여넌간 전세계 바다를 다니느라 교 유가 전혀 없었지요. 그이가 당시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11시30분에 퇴계로 아스토리아 호텔 커피숍으로 나 오라 길래 그러 마고 했어요.』
호텔에는 중정 요원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승용차에 탔다. 차는 잠시 후 천씨를 말로만 듣던「남산」으로 안내했다.
『정보 부 건물 입구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비 표를 내게 주더군요.「나올 때 이것이 없으면 안되니까 잘 챙 기라』는 주의를 받은 기억이 납니다. 허문도씨가 널찍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오랜만입니다 형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라고 인사하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앉아라」고 해요. 그리고 내게 인사기록카드 복사 본을 한 장 주더군요.「너 전기 하나 써 볼래. 이분 거다」하 길래 얼핏보니「성명 전두환, 계급 대위, 직위 인사과장, 보증인 이규동·박종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곧 대통령이 될 분이라는 거예요. 뒤에 안 일이지만 전두환 장군이 61년 중 정 인사과장으로 재직할 때의 인사기록카드였습니다.』
69년 도 신춘문예로 등단한 천씨는 우리 문단에서는 드문 체험소설(해양소설)을 잇따라 발표해 주목받고 있었다. 바다를 돌아다니는 형편이라 신춘문예 응모작에 아예 당선소감까지 동봉해 보낸 것이 데뷔할 때 화젯거리로 등장했었다.
그가 허 특보를 만날 당시 웬만한 식자층에서는 이미 전두환 장군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8월16일)하기 전이었으나, 대학가에서조차 『새시대의 지도자는 이마가 벗어져야 하고…』운운하는 인신공격 성 블랙유머가 은밀히 퍼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천씨 본인은 이런 국내사정을 몰랐고, 모르기 이전에 무관심했다.
『한국은 명백히 군부의 리더십과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지도력은 단순히 본인이 원한다거나 야망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의 섭리나 중국인들이 말하는 천명에 맡겨져야만 한다.』
전두환 장군의 8월8일자 뉴욕타임스 인터뷰 발언에서는 집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는 뉘앙스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천금성씨의 계속되는 회고.
『전두환 장군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더구나 전기 류의 글은 써 본 일도 없고요. 허 특별보좌관은「거 왜 워싱턴이나 링컨 전기 같은 것 있잖아. 원고지 삼사백장이면 돼」라며 권했습니다. 까짓 거 삼사백장을 못쓰랴 하는 생각에서 응낙했지요.』 착수금조로 50만원이 든 봉투를 받아 들고 정보 부에서 나온 천씨는 며칠간 괜히 이 일을 떠맡았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있어라" 당부>
『후일 생각해 보니 허씨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 나를 전기집필자로 꼽았던 것 같아요. 우선 해양소설만 써 왔으니 정치·사회적인 선입견이 없는, 좋게 말하면「프레시한」작가로 여겼겠지요. 스타일이 행동묘사 위주니까 글에 미사여구냐 사족을 달지 않겠구나 싶었겠고요. 여기에 대학 때의 학보사 선후배로 안면도 있으니 나를 선택했을 겁니다. 아무튼 며칠간 고민하다가 전두환 장군의 장인·장모(이규동씨 내외)를 만나 얘기를 듣고, 전장군의 고향(경남 합천)을 찾는 식으로 집필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전기『황강에서 북악까지(부제-인간 전두환·창조와 초극의 길)』은 이렇게 해서 씌어졌다. 천씨는 80년 10월말 1천2백장 분량을 탈고했다.
『당시 50만원은 원양어선 선장의 한달 봉급에 해당했어요. 허씨가「합천에도 가야하고 1사단 관계자들도 취재해야 할 테니 우선 차비나 하라」며 준 돈이 길래 차비가 50만원 정도면 원고료는 훨씬 많겠구나 싶어서 돈 문제는 아예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지요. 합 천으로 취재여행을 한번 다녀오니 10만원이 달아나더군요. 집필기간 중 1백 만원씩 두 번을 더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어요. 2백50만원으로 두 달 넘게 취재를 다니고 집에 생활비도 주고 하려니 턱없이 모자랐지요.
원고가 완성되자 그 즈음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있던 허씨가 수고했다면서「대통령각하의 전기를 썼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고 시골에 가 조용히 있어라」고 당부하더군요. 돈이 떨어진 상태라 출판사(동서문화사)에 가서 인세 조로 1백 만원을 가불해 고향(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26면에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