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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도올고함(孤喊)

소리가 아닌 대의를 향하여 지방자치는 잘 가고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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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이름만은 익히 알고 있는 '목민심서'라는 책이 있다. 목민(牧民)이란 지방관으로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이요, 심서(心書)란 그 목민의 핵심(核心)을 적어 놓은 정요(政要)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산(茶山) 자신은 목민의 마음(牧民之心)만 있을 뿐 그것을 실천해볼 기회가 없어 그냥 심서(心書)라 이름한다 했으니, 그 울울한 심사가 엿보인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강진에 유배되었다. 나도 젊었을 때 다산을 흠모하여 귤동 초당에 한동안 기거한 적이 있다. 그곳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련한 남해의 정취는 형 약전(若銓)을 사모하는 다산의 비감을 더욱 짙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찌 그 고독한 설움이 열아홉 해나 지속되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귀양이 풀리던 해에 비로소 완성된 것이 '목민심서'였다. 군자의 배움(君子之學)은 수신(修身)이 반이요, 목민(牧民)이 반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심서'의 첫마디를 이렇게 장식하고 있다: "타관가구 목민지관 불가구야(他官可求, 牧民之官, 不可求也.)" 다른 벼슬은 구해도 좋으나 지방목민관만은 구할 것이 못된다. 목민관 노릇은 옛 공후(公侯) 노릇 하는 것보다 몇백 배나 어렵고, 능력이 없는 자가 그 자리에 잘못 앉으면 여독이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 그 재앙이 자손만대에까지 두루 미친다는 것이다.

관리(官吏)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그것을 '공무원'에 해당되는 말로서 두루뭉술하게 쓰고 있지만, 예부터 관(官)과 리(吏)는 엄격히 구분되는 말이었다. 관은 중앙에서 임명되어 부임하는 목민관을 말하는 것이요, 리는 지방에서 뿌리박고 사는 아전(衙前).서리(胥吏)를 말하는 것이다. 관은 이동하지만 리는 이동하지 않는다. '심서'라는 책은 어떻게 정의로운 관(官)이 리(吏)의 장벽을 뚫고 선정(善政)을 펼칠 수 있는가를 고구(考究)한 역저(力著)인 것이다.

'심서'는 지금 보면 중앙집권시대의 낡은 유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주장의 핵심은 아직도 적확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목민관이 중앙에서 파견되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선출되는 것이라 하지만, '선출'이라는 제도 자체가 지방토호들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민주의 형식이 탐관오리의 발호만 조장하고 있는 꼬락서니일 수도 있다.

지방자치는 크게 서비스 기능과 통제 기능으로 대별된다. 관청과 국민의 거리는 좁혀졌다. 서비스 측면에서는 과도할 정도로 친절하게 민원이 처리되고 있지만, 통제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는 국가 기본질서의 해체가 방치되어 가고만 있는 것이다. 환경오염, 인허가 취소, 무허가건축, 불법 주정차, 탈세, 식품위생, 노점상, 산림 불법훼손 등등의 문제가 '선거'라는 제도와 그 득표에 영향을 주는 토호들의 이권으로 인하여 그 정당한 기준을 상실해 가고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치단체장들은 과시적 건축물, 그리고 아이디어가 빈곤한 축제에 목을 걸 뿐 지속적인 지방문화의 창출에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자치로 인한 국가대계의 창조적인 구조적 변화가 감지되기 어렵다. 그리고 국토를 망가뜨리는 거대한 토목공사는 대부분 지방토호들의 이권과 결탁되어 있다.

지방자치는 기득권자들의 소리(小利)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민주시민으로 거듭나는 대의(大義)를 학습해 가는 교육의 장이다. 민주시민의 제일차 덕목은 자유가 아닌 협동(cooperation)이요, 권리의 주장이 아닌 의무의 이행이다. 정의로운 목민관을 만드는 것은 국민의 안목이다. 대의를 위하여 헌신하는 목민관이 정적(政敵)의 모함으로 곤욕을 치르고, 토호들의 이권과 타협하지 않기에 하차하는 사례 또한 적지 않다. 11일 전남일보 1면은 전라남도 단체장 구속과 소모적 정쟁이 너무 심해 지역민생 또한 옥에 갇혀 있다고 쓰고 있는데 법조계도 공의(公義)에 따라 소모를 줄여 가야 할 것이요, 우리 국민도 지방자치의 근원적 당위성을 한번 반추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이 15일 청목회(靑牧會)에서 내가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