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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박 대통령의 용신들|면면히 이어온 막 강「파워군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박정희 대통령 다음으로 오래 집권했던 초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대통령 비서관은 통틀어 15명뿐이었다. 부통령 비서실의 비서관 5명을 더해도 1공화국의 정·부통령 비서관은 총 20명에 불과했다.
제2공화국도 마찬가지. 고작 6명의 대통령 비서관이 이 기간 중 재임했다. 그나마 이 6명중5·16이후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최고 회의의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이동원씨(전 외무부장관)는 어디까지나「박정희 사람」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63년 12월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80년 제5공화국이 성립될 때까지의 3, 4공기간 중 청와대 비서실을 거쳐간 사람은 무려 2백5명에 이른다. 특별 보좌관 실에 근무했던 인원 54명을 합치면 총 2백59명(일부 인원은 중복).

<전·현 대통령도 측근>
이 거대한「인재군단」은 박정희 대통령을 정점으로 60∼70년대에 걸쳐 정치·경제·사회·국방·과학기술 등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를 사실상 주도했다. 공화국이 두 차례 더 바뀌었지만 박정희가 공들여 모아 놓은 인재군의 위력은 어쩔 수 없는 고령화에 따라 세대교체가 상당히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6공들어 정부각료를 지낸 이들 중에도 3, 4공의 비서실명단에 올랐던 이름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경제 비서관 출신의 이희일(전 동자부장관)·정영의(전 재무부장관)·이진설(전 건설부장관)·고건(전 서울시장)·이규성(전 재무부장관)씨, 사정특보 출신의 김영준감사원장, 정무 비서관을 지낸 홍성철 전 통일원장관·김태호 전 내무부장관, 법률 비서관을 지낸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 사정 비서관이었던 서정신 서울 고검장과 이건개 서울지검 장…. 최근의 10·9개각으로 출범한「중립내각」에도 박정희 시대 후반의 정무수석 비서관이자막후 실력자로 꼽혔던 유혁인씨가 공보처장관으로 등용됐다.
무엇보다 박정희 이후 3명의 대통령이 모두 박대통령의 측근 중에서 배출됐다. 박 대통령의 외교특보를 거쳐 국무총리를 지낸 최규하 전 대통령에 이어 70년대 후반 대통령 경호실의 작전차장 보 자리를「맞 교대」했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현직 대통령이 그들이다.
청와대 경호실·중앙정보부·보안사 등 막강한 권력기관으로 꼽히던 기관은 불론 일방 행정부처 출신들간에도 재직시의 동지애를 다지는 친목모임이 제각기 있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실만은 이같은 전직 자들의 모임이 없다. 이에 대해 비서실출신인 K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 대통령을 모시던 사람들 만으로라도 모임을 구성해 보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실패했어요. 비서실은 경호 실이나 정보 부와는 달리 일체감을 갖게 하는 요인이 적은 조직이었고, 정권이 바뀐 뒤에는 제각각 이해관계가 엇갈렸기 때문이지요. 원래부터 다양한 분야에서 차출된 인물들로 구성된 데다 10·26이후 쫓겨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 정권에서 계속 일하는 사람도 있고 해서 끈끈한 인간관계를 기대하기 어려웠던가 봅니다』

<야 의원으로 변신도>
박 대통령 휘하에서 9년2개월의 최장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68)는 10·26이후 일절 공직을 맡지 않은 채 여생을 보내고 있다. 김씨는 회고록『한국경제 정책 30년 사』를 최근 펴 낸데 이어 정치분야의 경험을 담은 두 번째 회고록을「사후에 출판되도록 하려고」준비중이다. 김씨의 뒤를 이었던 김계원 전 비서실장은 10·26의 현장에 있었다는 점 때문에 한때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2년6개월 만인 82년 5월 석방됐다. 김계원씨는 현재 교회 장로로 신앙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이들 두 전임 비서실장이 한때수난을 겪고 안 겪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교적 단아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데 비해 이후락 전 비서실장(68)은 아직도 자신에게 쏠리는 세간의 눈길을 피해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씨는 취재진이 자신의 집과 도요지가 있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 면을 방문해도 아예 마주치기를 거부하고 있다. 몇 차례 그곳을 찾아갔으나 헛걸음했던 기자는 서울에서 열린 한 모임에 나타났던 이씨와 간신히 대면할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호텔신라 23층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역대 안기부장(중정 부장)의 망 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던 이씨는 그러나 자신에 대한 언론의 보도 내용에 강한 불만을 나타낼 뿐 다른 대답은 피했다. 그는「나를 만나 보지도 않고 잘 들쓰더구먼』이라며 불쾌해 했다.
『그렇다면 직접 나서서 사실을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자의 말에 그는 강한 톤으로 한마디를 내쏘았다.『따로 바로 잡는 방법이 있어!』
공보수석 비서관과 문공부장관을 역임한 김성진씨(61)는 최근 1년 이상 미국에 머무르며 대수술(간장이식)을 받고 지난 7월 귀국, 사실상「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권유로 대우 부회장에 취임했다. 거의 극한상황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김씨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꿈에 나타난 일, 그리고 그「현몽」이 신기하게도 수술의 성공과 무관하지 않았던 일등은 아직도 정·관계의 잔잔한 화제 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윤필용 사건의 주역들 중 당사자인 윤필용씨(65)는 담배 인상공사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사건수사를 당당했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65)은 일본유학·명지대 교수 생활을 거쳐 현재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김대중 대표 진영에서 활약중이다.
이들 외에도「박정희 군단」의 정상급 지휘관 중 많은 이들이 이미 타계했다 . 김형욱 전 중앙정보 부장 같은 이는 권력을 잃은 후 미국으로 달아나 박 정권의 등에 비수를 들이대다가 의문 속에 세상에서 사라졌다.

<한-중 예술교류 힘써>
박 대통령이 앞세운 김학렬 전 총리(72년 작고)·김성곤 전 공화당 재정위원장(75년 작고)등 한때의 총신들이 있는가 하면 김재규·차지철 등 10·26 시해사건에 직접 얽혀 든 바람에 운명을 마감한 측도 있다.
김형욱에 앞서 정보부장을 지낸 김재춘씨(65·육사5기)는 대만과의 문화교류를 위해 설립한 한중예술 연합회를 20년 가까이 이끌어 오고 있다. 혁명주체 중 육사5기 그룹과 대립했던 8기 그룹의 대표선수이던 김종필씨는 지금도 민자당 대표로 정치일선에서 활약하면서 과거의 정적이던 김영삼 총재를「주부 입장」에서 돕는 상황이 되었다.
경제2수석 비서관으로 70년대 중화학 공업·방위산업을 주도했던 오원철씨(62)는 올해 들어 12년간의 은둔생활을 청산했다. 그는『세상 돌아가는 일에 눈감고 살았다. 집에 칩거하면서 신문·잡지도 보지 않고 완벽한 공백상태로 지냈다』고 지난 12년을 표현했다. 김선홍 기아자동차 회장이 적극 권유해 올해 3월 기아 경제연구소의 상임고문으로 취임함으로써 오씨는 다시 세상에 나왔다. 그는 한 경제신문에「산업전략 군단 사」라는 제목으로 자신이관여한 격동기의 경제발달사를 집필 중이다」박 대통령 밑에서 함께 고생한 분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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