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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가고 인간은 남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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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14면

‘미션 임파서블’

첩보영화에는 관객이 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스릴, 서스펜스, 총격전, 자동차 추격전, 위험한 사랑, 팜므 파탈 등등 현대 사회의 모든 위험과 불안이 첩보영화에서는 일상으로 존재한다. 그것을 극단적인 낭만으로 채색하면 바람둥이 스파이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고, 현실 그대로 영상에 옮기면 ‘시리아나’나 ‘굿 셰퍼드’처럼 암울하고 삭막해진다. 첩보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냉혹하고 잔인하고 야비하다.
 
영화가 ‘스파이’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다. 마르네 디트리히의 ‘불명예’(1931년/이하 연도는 뒷자리만 표시)와 그레타 가르보의 ‘마타 하리’(32). 그들은 단순한 스파이가 아니라 팜므 파탈, 즉 남성을 유혹하여 정보를 빼내는 고혹적인 여인들이었다. 알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남성들의 환상. 1차 대전 이후에도 여전히 치열한 첩보전의 무대였던 유럽에서, 영국은 일찌감치 첩보영화에 주목했다.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은 다양한 스타일의 첩보영화를 만들었다. ‘39계단’(35)과 ‘사라진 여인’(38)은 경쾌한 추리물 같은 느낌의 첩보영화이고, ‘사보타지’(36)와 ‘오명’(46)은 첩보전의 비정함을 전면에 내세운 어두운 영화였다. 히치콕은 영국에서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남자’(34)ㆍ‘비밀 첩보원’(36) 등을, 할리우드에서는 ‘올 스루 더 나이트’(42)ㆍ‘미니스트리 오브 피어’(45) 등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필름 누아르 스타일을 가미한 ‘외투와 단검’(46)ㆍ‘오명’(46)ㆍ‘스파이 사냥’(50) 등을 만들었다. 히치콕은 첩보전의 현실을 폭로하기보다는 냉혹한 조직과 차가운 인간의 내면을 그리면서 스릴과 서스펜스의 무아지경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다. 이후 첩보영화의 기본적인 플롯은 이미 히치콕의 영화들에 모두 들어 있었다. 스파이간의 피 말리는 첩보전만이 아니라 히치콕이 아주 좋아했던, 평범한 사람이 우연히 비밀을 알게 되면서 위험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는 ‘콘돌’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등에서 되풀이된 내용이다.

영화 속 스파이들

007시리즈, 냉전의 불안 담아
냉전체제가 가속화하던 50년대에는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49)ㆍ‘나는 FBI의 공산주의자’(51) 같은 반공산주의 첩보영화들도 등장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현실의 적을 공격하는 것보다는, 알 수 없는 적의 침입이 더욱 두려웠다. 50년대에 유행했던 ‘바디 스내처’ 등의 SF 공포영화들은 은밀하게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영화였다. 50년대 후반에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59)처럼 미지의 국가나 단체의 공격을 상정한 첩보영화도 등장한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을 각색한 007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 ‘닥터 노’(62)에서도 스펙터란 조직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으로 나온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적이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고, 그것이 언젠가 평화를 위협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냉전체제는 언제나 ‘공포’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뮌헨’

하지만 첩보원의 세계는 또한 매혹의 대상이기도 했다. 전 세계를 떠돌면서 멋진 여인과 만나고, 마음대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법을 뛰어넘는 모든 행동이 가능한 ‘영웅’으로 보는 판타지도 존재한다. 숀 코너리가 주연한 ‘닥터 노’로 시작된 007 시리즈는 가장 많은 영화가 만들어진 프랜차이즈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성적인 매력이 넘치고 농담을 즐기는 새로운 스파이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사실 007 시리즈가 완전히 허무맹랑한 첩보영화는 아니었다. 최신작 ‘카지노 로얄’이 초기 007의 정신으로 돌아간다고 선언한 것처럼, 숀 코너리의 007은 리얼한 첩보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007 시리즈가 낭만적인 스파이의 유희로 변한 것은 로저 무어의 007이었다. 80년대 들어 냉전의 열기가 더욱 뜨거워지고 있을 때, 007 시리즈는 서구와 소련의 스파이가 힘을 합쳐 지구를 구원하는 판타지의 공간이었다.

낭만적인 007의 세계와 달리 현실은 더욱 비정해졌다. 존 르 카레의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65)는 각국 스파이들이 노골적으로 활동하던 서베를린에서 벌어지는 첩보전을 차갑게 그려냈다. 로버트 레드퍼드가 나온 ‘콘돌’(75)에서는 비밀을 감추기 위해 일반 직장으로 위장해 들어간 하부 조직원들을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모두 죽여버린다. ‘마라톤맨’(76)은 평범한 시민이 음모에 휘말려 나치 잔당과 미국 정보기관에 동시에 쫓기게 되는 이야기다. 사실적인 첩보영화들은 주로 첩보전의 비정함과 정보기관의 폭력적인 임무수행을 폭로한다. 국가의 이익을 절대적으로 추구하는 첩보전의 세계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전혀 보장받지 못한다. 집단의 싸움에서 개인은 단지 도구일 뿐이었다.

‘블랙북’, ‘007 두 번 산다’, ‘시리아나’, ‘굿 셰퍼드’ (왼쪽부터)

작가 톰 클랜시의 등장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냉전이 해체된 후에도 첩보전의 세계는 변화하지 않았다. 애초에 정보기관의 임무는 적을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보기관이 계속 번창할 수 있는 불안한 세계의 유지였기 때문이다. 90년대의 첩보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작가 톰 클랜시의 등장이다. 톰 클랜시의 소설이 각색된 영화로는 CIA의 정보 분석가 잭 라이언이 주인공인 ‘붉은 10월’(90)ㆍ‘패트리어트 게임’(92)ㆍ‘긴급명령’(94)ㆍ‘섬 오브 올 피어스’(02)가 있다. 각각 소련 잠수함의 망명, 아일랜드공화군(IRA) 테러리스트, 중남미의 마약조직, 동구권의 핵폭탄을 이용한 미국 본토 테러를 다루고 있다. 톰 클랜시는 미국의 백악관이나 정보기관에서 조언을 요청할 정도로 첩보전과 현대 무기에 대해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다. ‘테크노 스릴러’라 불리는 톰 클랜시의 소설은 국제정세나 무기 분야에서 첨단의 정보를 가지고 능숙하게 위기상황을 만들어낸다. 냉전이 사라진 지금, 오히려 정보기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음을 톰 클랜시는 보여준다. CIA 국장 출신의 부시가 대통령이 됐던 것처럼 소설 속의 라이언 역시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스파이 판타지와 혐오 공존
로저 무어가 물러나면서 007 시리즈도 사실성을 약간 강조하게 된 것처럼 영웅으로서의 스파이도 변모했다. ‘미션 임파서블’(96)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언 헌트는 제임스 본드처럼 매력적이지만, 철저한 프로페셔널이며 가정을 중시하는 성실한 가장이다. 첩보전의 세계 역시 사상보다는 돈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전개되는 이전투구로 바뀌었다. ‘미션 임파서블’이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세계관 속에서 진행되는 스파이 판타지라면, ‘본 아이덴티티’(2002)로 시작된 제이슨 본 시리즈는 스파이의 세계를 근원부터 해체한다. 기억을 잃은 채로 바다에 내버려졌던 제이슨 본은,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투쟁한다. 본은 자신이 정보기관을 위해 엄청나게 추악하고 잔인한 만행들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은 살인병기였던 과거의 자신이 아니라 잃어버린 기억 위에 새로운 자신을 세우기 위해 과거의 동료ㆍ상관들과 싸운다. 냉혹한 스파이가 아닌, 인간 제이슨 본을 찾기 위해서.

정보기관 뒤의 국제정치
21세기 들어 첩보영화는 스파이와 정보기관의 근원을 깊숙이 파고들어간다. 첩보전의 비정함이 아니라 국제정치와 정보기관 자체의 모순을 응시하는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06)은 72년 뮌헨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검은 9월단’이 침입하여 이스라엘 선수단을 죽이자,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서 피의 복수에 나선 이야기다. 서로 죽여야 할 이유는 존재하지만, 그 결과는 끊임없는 복수의 악순환일 뿐임을 보여준다. 전직 CIA 요원이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각색한 ‘시리아나’(06)는 서구의 중동정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실행되는지를 폭로한다. 석유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가 움직이고, 정보기관은 중동 국가의 왕족 암살까지도 계획한다. 그리고 계획이 틀어지자 암살을 기획했던 요원을 희생양으로 내쳐버린다. ‘굿 셰퍼드’(07)는 CIA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원칙으로 움직이는지 보여준다. 국가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대부’의 마피아가 그랬듯이, CIA 요원들 역시 노력하면 할수록 그들의 가족과 자신의 내면이 붕괴하는 광경만을 목도하게 된다. 가장 도발적인 감독 폴 버호벤이 고향 네덜란드로 돌아가 만든 ‘블랙북’(07)은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다. 나치에도 선인이 있고, 레지스탕스에도 악인이 있다. 유대인 여인은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는다. 모든 집단은 부패하고, 집단을 절대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폭력이 될 수밖에 없음을 ‘블랙북’은 말해준다. 첩보전은 선과 악의 아마겟돈이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한 야비하고 폭력적인 투기장일 뿐임을 21세기의 첩보영화는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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