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 도구리 일대|이육사 시「청포도」의 고장|삼륜 포도원 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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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이 마을 전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던 육사 이활(1905∼1944)의 시「청포도」의 창작배경으로 알려진 영일만의 옛 포도원이 도시개발에 밀려 사라져가고 있다.
경북포항에서 구룡포 방면으로 15㎞쯤 떨어진 영일군 동해면 도구리.
육사의 대표적 시「청포도」는 영일만 푸른 바닷물이 하얗게 부서지는 도구리 뒷동산의 삼륜포도원에서 조국광복의 애절한 소망을 그리며 시상을 떠올렸던 것.
조선조중기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활은 21세 때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광복운동에 투신한 뒤 22세 때인 1927년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장진홍 의사와 함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2년여 동안 참혹한 옥고를 치렀다.
육사가 이곳 도구리를 찾았을 때는 출옥 후 갈기갈기 찢긴 심신을 달랠 곳을 찾아 헤매던 1930년대 후반.
경주 남산아래 옥룡암에서 숨어 지내던 육사는 포항의 우국청년 김영호·정의호·이석진 등을 만나기 위해 이곳 삼륜포도원을 찾았다가 눈부시도록 파란하늘과 쪽빛 바다를 가슴에 안고 탐스럽게 익어 가는 청포도의 목가풍에 심취돼 민족의 울분과 조국광복을 기다리는 시상 떠올렸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육사의 시작을 지켜봤던 김대정씨(77·포항향토사학가)등 포항·영일지역 원로문인들의 참고문헌 조사와 현장답사로 밝혀진 것.
김씨는『당시 포항의 선배문인들이 참으로 귀한 손님이 찾아 왔다기에 삼륜 포도원까지 달려가 육사를 만났다』며 『그로부터 얼마 후 서울에서 보내 온 짤막한 사연과 함께 청포도의 주류를 이룬 내용의 편지를 받았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고 말했다.
아동문학가 손춘익씨(52) 등이 고장 문인들도『청포도의 창작배경이 일찍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당시 육사가 고등계의 요시찰 대상이었던데다 우국 청년들과의 밀회가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이라며『육사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려우나 도구리 포도원에서 청포도의시상을 얻었다는 사실은 포항지역 문인들의 공통된 시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곳 도구리의 옛 삼륜포도원을 포함한 주변의 포도경작지와 임야 등 20만평이 이미 지난해부터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돼 95년까지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될 계획.
이 때문에 포항문인협회와 영일군 문화원 등 지역문화단체에서 뒤늦게나마 육사의 시작배경이 된 옛 삼륜포도원 부지 일부만이라도 남겨 원상복구와 함께 시비를 세우고 문화유적지로 가꾸기 위한 사업추진에 나서고 있다.
예부터 청포도 주산지로 알려진 이곳 도구리 일대는 일제암흑기이던 1930년대부터 일본인들이 강점하기 시작, 수십만평에 이르는 대규모 포도원을 조성하고 우리 동포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면서 악랄한 수탈을 일삼았던 곳.
특히 일본인들은 포항시내에 동양최대의 삼륜 포도주 회사를 설립, 태평양전쟁당시엔 남양군도에 이르기까지 군납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40년대에 들어 일본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활주로를 닦고 군용비행장(현 포항공항)을 건설하는 바람에 포도원이 점차 잠식되기 시작한데다 8·15 해방과 6·25전쟁 이후엔 대부분의 포도원이 군사시설 확충에 편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까지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하던 포도원이 70년대 들어 인근에 포항종합제철의 연관단지와 주택가가 들어서고 일부는 농가소득을 올리기 위한 비닐하우스로 탈바꿈하는 등 거의 폐원이 되다시피 해 이제육사의 발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자그마치 17차례나 투옥되면서 항일투쟁으로 일관해 온 육사는 1937년 동인지「자오선」 에 불후의 명작「청포도」를 발표한 뒤 폐가 나빠 서울명동성모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으며 1942년 북경으로 건너갔다가 항일독립운동과 관련, 일경에 체포돼 광복을 불과 1년 앞두고 북경감옥에서 옥사했다.
「청포도」와「교목」「광야」「황혼」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오늘날 육사시집에 전하고 있다.【포정=홍권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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