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사과' 미 전역 확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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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2월 버지니아주에서 시작된 '노예제 사과' 물결이 미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400년 만의 배상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뉴욕주 의회는 조만간 북부지역 주로는 처음으로 노예제에 대해 공식 사죄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라고 일간 뉴욕 선이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뉴욕주는 일찌감치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은 북부지역 주였으나 적잖은 주민이 노예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음에도 이를 묵인했다.

뉴욕주가 결의안을 채택하면 버지니아.메릴랜드.노스캐롤라이나.앨라배마에 이어 노예제에 공식사과하는 다섯째 주가 된다.

특히 뉴욕주 의회에는 노예제 사과 결의안과 함께 배상 문제를 연구토록 하는 특별위원회 설치법안도 함께 상정돼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사과 결의안이 미 전역으로 번지게 된 데는 미 최초의 영국인 정착지인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 건설 400주년 기념행사가 기폭제가 됐다. 버지니아주 의회는 1607년 제임스타운이 건설된 뒤 노예제를 합법화했다.

이로 인해 버지니아 하원 의원들은 뒤늦게나마 노예제 합법화에 대해 공식 사과해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고 2월 찬성 96, 반대 0으로 사과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제임스타운은 1619년 아프리카 흑인 20여 명이 처음으로 북미에 발을 디딘 곳으로 노예제와 관련,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다른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쳐 이에 동참하는 주들이 속속 생겨났다.

공식 사과가 잇따르면서 일부 시민운동가들이 요구해 온 노예제 배상문제가 새삼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 미 정부의 묵인 아래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의 인권을 유린한 만큼 후손들에게 적절한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노예제 배상이 실현될 경우 미 당국이 져야 할 금전적 보상액이 엄청날 게 틀림없을 뿐더러 노예 후손들을 가려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게다가 노예제 배상이 이뤄지면 백인들의 정착 이후 50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는 인디언에 대한 처우 문제도 불거지게 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미 언론에서는 노예제 사과가 폭넓게 번지더라도 배상 실현으로 이어지긴 힘들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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