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년 전 만든 일본 사찰 '한글 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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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바현 다테야마(館山)시에 있는 불교사찰 다이간인(大巖院)에는 참배객의 눈길을 끄는 특이한 석탑이 있다. 정문에서 법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이 사면석탑에는 이란 중세 한글 표기가 새겨져 있다. 380여 년 전 오지 마을이나 다름없었던 다테야마에 한글 비문을 새긴 석탑이 세워진 배경은 무엇일까. 학자들의 연구로 그 수수께끼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다.

◆"한글 표기의 모델은 아미타경"=높이 2m19㎝의 사면석탑은 외양이 비석에 가깝다. 동서남북 네 면에는 각각 한글과 중국의 전서체 한자, 일본식 한자, 산스크리트어로 각각 '나무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다. 또 북쪽에는 1624년 야마무라 모헤이(山村茂兵)란 사람의 시주로 세워졌다는 간략한 유래가 씌어 있다.

동쪽에 새겨진 한글은 음가가 없는 'ㅇ'받침을 써 넣은 이른바 '동국정운'식 표기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 초기부터 16세기까지만 사용된 표기법이다. 즉 이 탑이 새겨진 1624년 당시에는 한반도에서도 사라진 표기 방식이란 뜻이다. 중세 국어를 전공한 동국대 장영길 교수는 현지 답사 결과를 토대로 사면석탑의 한글 표기와 서체가 '아미타경언해 쌍계사본'(1558년 간행)과 흡사하다고 분석했다. 임진왜란 기간 중 일본에 전해진 이 불경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해당 글자를 참고해 비문을 새겼을 것이란 추정이다.

◆"임란 희생자를 기리는 평화의 탑"=가장 큰 수수께끼는 탑을 세운 사람이 어떤 의도로 한글을 새겼느냐는 점이다. 이와 관련, 다테야마 지역의 향토 사학자들은 "임진왜란 때 숨진 조선인을 위령하고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한글을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학설을 내놓고 있다. 이들은 당시 다이간인의 주지 오요(雄譽)의 행적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도쿠가와 막부와 밀접한 관계였던 오요가 에도(江戶.현재의 도쿄)에서 조선통신사나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인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향토사학자 이시와다 히데유키(石和田秀幸)는 연구 논문에서 "사면석탑은 일본과 조선 사이에 일어난 비극(임진왜란)을 극복하고 평화와 신뢰 회복을 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테야마=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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