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박 대통령 집권18년|정치 열등생|경제 우등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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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이씨의 의견.>
『성장기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닌 편이기에 솔직히 박정희 정권 당시에는 특별한 관점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박대통령에 대한 평가 역시 상대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우선 긍정적인 면이 있지요. 필리핀·인도네시아·태국같이 60년대 초반 우리보다 나은 여건을 가진데다 박정희 못지 않은 강한 권력자가 있었던 나라들이 훗날우리에게 추월당한 것을 보면 박정희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경제우위정책 일관>
그러나「누구든지 총칼로 일단 뒤엎어 놓고 그 후의 결과만 좋으면 다 정당화된다 입는 식의 일반화는 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박정희가 아니라도 누구든 그 못지 않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는 식의 논리가 지나친 비약이듯이 말입니다. 집권방식에 큰 문제가 있지요. 어떻든 박 정권은 경제우위정책 면에서는 뚜렷한 일관성을 보였어요. 모든 이데올로기를 골 살아 보자」는 한마디로 대치한 것으로 봅니다.』
이씨는『개인적으로는 소설작품을 통해 박정희 시대 속의 나를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 중』 이라고 밝혔다.
이진희 전 문공 장관(60)은 박대통령을 철저한 민족주의자·국가주의자로 보면서, 특히 그가 국민적 자신감을 회복시키고 국력을 응집했다는 데에 주목하고 있다.
이씨는 언론인(동아일보기자)시절이던 61년6월3일 윤보선 당시 대통령의 인터뷰기사를「조속한 민정이양이 필요하다는 요지로 보도했다가 박정희 소장 등 쿠데타주역들의 분노를 사 40여일 간 감방생활을 한 악연이 있었다. 훗날 이씨는 유정회 의원을 역임했고, 지금도 박정희 시대의 역동성을 적극 옹호하는 입장.
『많은 이들이 박대통령 집권초기와 말기의 한국과 필리핀·태국 등을 비교하는데, 이런 면도 있어요.
만약 박정희라는 인물이 한국 아닌 필리핀에 태어났다고 칩시다 이럼 필리핀의 경제력이 「박정희 필리핀대통령」의 통치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한나라 국민의 역사적 자질 축적은 무시 못합니다.
우리 국민의 교육수준을 말하지만 해방후의 교육열도 그냥 생긴게 아닙니다. 또 한국인의 기질상 일단 신바람이 나면 죽자사자 하는 맛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배경에서 문제는 누가 이 사람들을 뭉치게 하느냐 입니다.
박대통령이 물리력(군)을 배경으로 단시일에 국민역량을 응집시킨 거예요. 이런 일은 그가 아니며 어느 누구도 못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힘만으로도 안되고 정치역량과 추진력, 강렬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되는 일이지요.

<"시대적 역할 다했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경제 사회적 기반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다르지만 갓 태어난 나라가 급속치 발전할 당시에 과연 서구식 민주주의가 적합했는가 하는 의문을 나는 아직 갖고 있어요.』
김성진 전 장관은 박대통령이 경제개발방식으로 택한「불균형 성장전략」을 변호하면서「당시 우리나라가 인도식으로 각 분야를 고루 발전시키려는 균형성장전략을 취했다면 오늘날의 인도정도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우리가 경제발전을 이룬 덕에 오늘의 중산층은 형성됐고, 따라서 지금 같은 정도나마 민주화가 진척된 것 아닐까요.
물론 인권탄압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나를 비롯한 아랫사람들이 대통령을 잘 모시지 못했기 때문이라는게 내 솔직한 심정입니다. 나도 당시 정부에 있던 사람으로서 피해를 본 이들에게 사죄하는 입장이에요. 나만 박대통령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발전사의 한 시대에 불가피하게 나타난 지도자인 만큼 공과는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시대적 역할을 충분히 다한 분 아닙니까. 국가를 발전시키겠다는 뚜렷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꼭 박대통령이 아니더라도 그와 같은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쌀독서 민주 난다">
아직 세간의 평가가 정리되지 않은 점을 감안해시인지 민족 중흥회가 지난달 주관한 10·26추도식에서는 박대통령 생전의 어록 중 무엇을 슬로건으로 할까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이 단체의 한 간부는『엄청난 분량의 박 대통령 어록집을 샅샅이 뒤적인 끌에「이 나라에 복지사회를 건설하려면 막대한 물질과 자본이 필요합니다」는 문구를 골랐다』고 말했다.
이 문구는 추도식장의 아치에 내 걸렸다. 이 간부는『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이 있지만 박 통령은「쌀독에서 민주주의 난다」는 생각을 했던 것 아닐까요. 그래서 어록 중 그런 문구를 고른 겁니다. 일반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것 같았어요』라고 설명했다.
무엇을 이어받고 어떤 점을 반면교수로 삼을지, 박정희와 그 유산에 대한 정밀한 대차대조표는 아직 완성되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가 우리 시대에 남긴 자취가 너무 깊고 폭넓은데다 그나마 대부분은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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