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민정신 지주는 "양보와 감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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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일본의 서쪽, 후쿠이역에서였다. 플랫폼까지 배웅 나와준 노리다케 선생의 부인께서 기차에 오르려는 나에게 전으로 싸여진 조그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아이들에게 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일본사회에서 살며 사람을 만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에 명함과 선물이 있다. 결코 상대방에게 부담되지 않으면서 마음을 즐겁게 하는 선물의 센스가 그래서 필요하다.
차에 올라 풀어보니 인형이었다. 그리고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제가 만든 인형입니다. 어쩔까 망설이다가 이곳이 종이의 명산지라 인형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드님과 따님이 계시다기에 남녀 두 어린이를 만들었습니다. 다만 인형에 얼굴을 그려 넣지 않았습니다. 본인들이 얼굴을 그려 넣으며 즐길 수 있으면 더욱 기쁘겠습니다.』
얼굴에 아무 것도 그려 넣지 않은 종이인형을 바라보면서 이것도 일본인들이 갖는 좋은 품성의 하나, 「오모이야리」(남을 위해 마음을 쓰는 것)」는 아닐까 생각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정성을 다하는 정신이다.
와세다대학의 다케이씨와 함께 전통연극 「가부키」공연을 함께 가기로 했을 때의 일이다. 공연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우편함에 입장권과 함께 관계자료들을 복사한 것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해 자세히 보니 그 봉투에는 우표가 붙어있지 않았다. 집에까지 와서 넣고 간게 틀림없었다. 물건은 잘 받았지만 아파트 밑에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전화를 했더니 부인이 말했다.
『우편으로 부치면 내일이나 도착하니까, 자료를 하루라도 빨리 보시는게 좋을 것 같아 가지고 간 것일 뿐입니다. 불쑥 찾아가는게 폐가 될 것 같아 우편함에 넣고 돌아왔는데, 좀 도움이 되시는지요.』
서로서로 위해 주며 산다고나 할까. 이렇듯 일본 사회를 윤기 있게 만들어 가는 것의 또 하나가 「남에게 폐(메와쿠)되는 일을 하지 말아라」하는 정신이다. 가정교육의 기본도 여기서 시작한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살도록 길러져서 그것이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는 것이다. 서로서로 자기를 조금씩 양보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사회 전체가 더 큰 편리함을 누리는 경우다.
일본은 집만 작은 것이 아니라 길도 좁다. 번화가가 아닌 한 일본의 인도는 두 사람이 우산을 들고 지나가기 힘들게 좁다. 그러므로 비오는 날에는 서로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쪽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먼저 서서 상대방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우산을 비켜들고.
열차가 머리위로 지나가는 오쿠보역 앞의 굴다리만 해도 그렇다. 역 앞의 이 좁은 길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이 다들 한 줄로 걷는다. 저쪽에서 아무도 오지 않아 길이 반쯤 비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들 걷는다. 서로 부딪쳐 기분 나쁜 일을 미리미리 한 줄로 걸으면서 없애버리고 있다. 「메와쿠」가 되지 않게 조금씩 양보하는 현명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흘려버리지 말아야 할 점의 하나는 시민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서로에 대한감시의 눈」이다. 감시기능이라고 해서 서로 홈쳐보는 무시무시한 공포사회를 말하는게 아니다.
저만 잘나서 저만 다 찾아먹겠다고 해서는 그 사회가 결집력을 가질 수 없다. 또한 서로를 감시하고 경계하면서 여러 의견을 하나로 모아감으로써 그 사회나 집단이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일본에서 쓰레기 분리수거가 실시된 것은 64년의 도쿄올림픽 이후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방식이 우리와는 달라 일본은 타는 쓰레기와 타지 않는 쓰레기로 나누어 버린다. 다만 못쓰게된 전자제품이라든가 가구 같은 것들은 구청 청소국에 신고하면 치워가는데 이때는 물건에 따라 별도의 요금을 내야한다.
또한 쓰레기를 집집마다 앞에 내놓는 것이 아니라 동네골목에 한곳을 정해 모아놓는다. 각자가 들고 와 쌓아놓은 쓰레기를 청소차가 실어가게 된다. 그래서 아침 출근길에 마누라대신 쓰레기 비닐주머니를 들고 나가 버려주는 남편은 만화에서 종종 「별 볼일 없는 남자」의 상징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이 서로의 감시기능이다. 불에 타는 쓰레기를 버리는 날 병이나 깡통 같은 안타는 쓰레기를 몰래 버렸다고 하자. 당장 누군가가 종이쪽지에 써서 붙인다. 『최근 쓰레기를 제대로 버리지 않는 일이 늘어나고 있으니 주의합시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그 쓰레기만 달랑 남겨놓고 치워 가는 경우도 있다. 그때는 또 누군가가 그 쓰레기 봉지에 『이 쓰레기를 버린 사람은 제대로 버리도록 하시오』라고 쓴 종이쪽지를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놓는다.
자기가 잘못 버린 쓰레기가 종이쪽지를 붙인 채 달랑 남아있는데야 그것을 보고 나서 또 마구 버릴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남이, 관청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민 각자가 약속된 바를 지켜가려는 노력이다. 남에게 폐 안 끼치면서, 서로를 생각해 주면서, 못된 녀석이 있나 눈을 부릅뜨고… 그렇게 일본인들은 오늘도 소곤소곤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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