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볼 ⑤ 야구는 팬티쇼 … 축구는 어럽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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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기자가 졸업한 초등학교는 부산의 야구 명문이다. 김경문(두산 감독).양상문(LG 코치) 선배가 있고, 마해영(LG)과 얼마 전 교통사고로 작고한 박동희 등 후배도 많다. 야구선수가 될 뻔했던 터라 친구 중에 프로야구선수 출신도 꽤 있다.

그런데 야구부 친구들을 보면 재밌는 게 있다. 수줍음을 잘 타고 말이 없던 아이들이 몇 년 뒤 한결같이 '개그맨'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야구는 끊임없이 떠들어야 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은 "피처 베이비" 같이 상대를 야유하거나 "한 방 날려라"처럼 동료를 격려하는 말을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해댄다. 그러니 입심이 세질 수밖에.

방송인 강병규는 선수 시절부터 TV에 나가 입담을 과시했고, 차명석.이병훈 등 프로 출신 해설자들은 개그 어록이 만들어질 정도다.

축구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9년 동안 수많은 선수를 인터뷰했지만 그들은 대부분 수줍어했고, 자기 표현에 소극적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이천수(울산) 정도다. 1999년 '부평고 3인방' 최태욱.박용호.이천수를 만났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나'라는 질문에 둘은 얼굴이 발개지며 우물쭈물했지만 이천수만은 "전지현요"라고 당돌하게 대답했다.

'축구는 전쟁이다'는 표현처럼 축구 선수는 경기 내내 숨이 턱에 찰 만큼 뛰어야 한다. 엄청난 속도와 투쟁심을 요구하는 축구장에 여유와 농담이 끼어들 틈이 없다. 더욱이 승부에 집착하는 한국 학원축구에서 자란 선수들은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 묶여 있다. 이들은 경기에 지면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을 연호하는 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프로'가 된다. 언론의 공식 인터뷰를 거부하는 게 왜 잘못인지도 모른다.

프로야구 SK의 이만수 코치가 "인천 문학경기장이 꽉 차면 팬티만 입고 뛰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 '거사'는 국내 미디어는 물론 해외 토픽에 소개될 정도로 파장이 컸다.

보름 뒤, 이번엔 부산이었다. 4회 초, 비 때문에 경기가 중단됐다. 퍼붓는 빗속에서 1만여 명의 '부산 갈매기'들은 2년차 손용석이 펼친 박정태 흉내 내기에 박장대소했다. 롯데 마스코트 인형을 뒤집어쓰고 재롱을 떤 사람은 구단 직원도, 아르바이트생도 아닌 베테랑 정수근이었다. 경기는 끝내 취소됐지만 사람들은 웃으며 경기장을 떠났다. 11시즌 만에 최단 기간 200만 관중을 돌파한 게 프로야구 수준이 갑자기 높아져서만은 아닌 것 같다.

한 축구인이 "요새 야구가 왜 그렇게 관중이 많아요. 축구는 안 그런데"라며 걱정을 했다. 그분에게 요즘 유행하는 CF를 빌려 '쇼를 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데뷔 첫 승을 한 뒤 영하의 날씨에 찬물을 뒤집어쓴 변병주 감독(대구)의 '물쇼'도 좋고, 골을 넣은 뒤 아들을 위해 펼친 김대의(수원)의 '스파이더맨 쇼'도 좋다. 물론 가장 멋진 쇼는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의 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팬은 왕이다. 그걸 아는 게 프로다.

정영재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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