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이끄는 “무관 황제”/14전대회 「실세」 입증한 등소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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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당·정·군에 무대뒤서 영향력 행사/공안·군 특수조직 등 사실상 장악
중국 공산당 당대회가운데 역사적 대회로 손꼽히는 제14차 전국대표대회(14전)를 마치며 최고실력자 덩샤오핑(등소평)이 88세의 고령에도 여전히 중국의 방향타를 장악하고 있는 실세임을 과시,새삼 주목을 끌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현직이라면 중국 교패(브리지) 협회의 명예고문 정도. 실로 무관의 황제라고 하겠다.
14전이 끝난 직후인 19일 인민대회당에서 장쩌민(강택민)당총서기 등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은 중국의 2000년대를 이끌 새로운 지도부로서 수백명 내외기자들 앞에서 자신들을 소개했다.
이 직후 같은 건물안에서 또 한사람의 지도자가 1천여 당원들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했다. 지난 1∼2월 남순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등소평이 8개월만에 공식석상에 나타난 것이다.
등소평은 양상쿤(양상곤),강택민,완리(만리) 등 행정부·당·의회 수반들의 수행을 받으며 당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하는 「움직이는 신화」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권위있는 원로정치가로서는 마지막 인물로서 「말대황제」로 불리는 그는 자신의 후계자 강택민의 손을 잡고 『14전이 완벽하고도 만족스러웠다』고 말해 강 총서기에 대한 신임을 재확인했다.
등소평은 또 14전의 인사개편과 노선설정을 모두 무대뒤에서 자신이 연출했음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같은 그의 절대적 지위는 우선 그 자신의 당·정·군에 걸친 경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서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서방의 민주적 제도의 의해 선출되는 지도자나 타강산(무력으로 권력을 장악)의 독재군주와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지위를 누려왔다.
중국의 초기 30여년간의 사회주의 건설작업이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새로운 개혁·개방노선을 이끈 등소평의 역할과 권위는 국내는 물론,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서방에서조차 「최선의 공산주의자」로 평가되고 있다.
등소평도 초기에는 군의 고 마오쩌둥(모택동),당의 고 류샤오치(유소기),정의 고 저우언라이(주은래)에 밀려 독자적 권력기반이 약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후 권력재편과정에서 반문혁·반모의 연합세력이 출현하면서 등소평은 당·정·군을 한손에 장악,부도옹의 명칭을 얻었다.
등소평의 실질적인 은퇴,또는 사망은 당내 주도권쟁탈이 벌어지는 천하대란을 의미한다.
등은 이처럼 주요직책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안정유지의 보루이면서 동시에 당내 균형자로 군림하고 있다.
등소평이 남순에 나서 개혁·개방을 가속화한 것은 등 자신의 아이디어가 아닌 주룽지(주용기)부총리가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 미루어 등소평은 사회주의 중국을 이끄는 가장으로서 그가 신임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위부여 역할도 하고 있는 셈이다.
중요 정치사안 뿐만 아니라 하다못해 관광사업까지도 등소평의 담화형식을 빌려야 효과적인 정책수행이 이뤄지게 돼있다.
그러므로 등소평은 사회주의 중국의 이념과 노선의 총정리자이며,중국의 인치풍토에서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는 권력의 화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등소평이 원로로서의 권위만으로 중국정국을 주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중국의 대부분 주요 정치과정이 비밀에 싸여있듯이 그의 권력장악구조가 비밀에 잠겨있는 가운데,국가안전부 및 인민해방군의 특수조직을 등소평의 친수가 장악하고 있다는 것도 정설로 돼있다.<북경=전택원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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