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이 지켜야 할 6월항쟁의 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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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올해로 6월항쟁 20주년을 맞는다. 여러 가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는 돌이킬 수 없는 큰 흐름으로 정착됐다. 20년 만인 어제 처음 정부 주관으로 기념식이 치러진 것은 감회가 새롭다. 6월항쟁은 단상 위의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세력의 것이 아니다.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중산층.소시민까지 참여했기에 가능했던 국민의 승리였다.

그런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어제 기념사에서 '우리 민주세력'이라고 했다. 국민 통합의 상징이 돼야 할 대통령이 국민을 '민주세력'과 '수구세력'이라는 자의적인 명찰을 붙여 구분하고, 갈등과 투쟁을 선동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면서 기념사 말미에 그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시대는 이제 끝이 났다"고 말했다. "새삼 수구세력의 정통성을 문제 삼을 수는 없으며, 민주적 경쟁의 상대로 인정하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같은 연설에서 '수구세력'을 척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다 갑자기 이렇게 말을 바꾸니 무엇이 진심인지, 스스로 정신적 혼란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당혹스럽다.

노 대통령은 '민주세력 무능론'이 수구세력의 양심 없는 중상모략이라고 비난했다. 현 집권세력이 권력을 잡은 지도 벌써 10년. 언제까지 낡은 체제에 대한 저항과 청산을 명분으로 국정 실패의 책임을 덮을 건가. 노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전체 민주세력으로 돌리는 건 당장 자신의 잘못을 희석시킬 순 있어도 전체 민주세력에는 짐을 지우는 일이다.

노 대통령은 6월항쟁의 성과물인 현행 헌법과 선거법 개정을 거듭 주장했다. 헌법이고 선거법이고 더 좋은 제도가 있다면 못 고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 개정 논의 운운하는 것은 판 흔들기에 불과하다.

며칠 전 원광대 강연에서 그는 "권력은 항상 사유화되고 남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는 제도, 권력의 적법성을 보장하는 제도로서 법치주의, 권력의 분립과 견제, 사법권의 독립, 적법 절차가 있다"고 말했다. 선거법과 헌법재판소의 결정,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경고를 깡그리 무시하고 연일 위법적 발언을 쏟아내는 그야말로 이런 절차를 무시하고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가 어제 강조한 대로 수구세력도 '민주적 경쟁의 상대로 인정'한다면 '다음 정권을 지키는 것'이 그의 역할이 돼선 안 된다. 대통령이 할 일은 공정한 선거관리다. 6월항쟁으로 어렵게 이룬 현행 법질서를 더 이상 허물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