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크라」서 공장 불하… 입찰과정서 「특혜」에 밀려 곤혹 치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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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구한말 일본상인들이 서울에 들어와 충무로 일대의 상권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데는 유리창이라는 비결이 있었다.
일본상인들은 그들의 점포에 일본에서 들여온 판유리로 가로진열장을 설치했는데 이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이미 1873년 종로 수운회관 앞에 건설된 일본공사관이 유리창을 처음 선보였고 일부 천주교성당도 유리창을 설치한 적이 있지만 일반인들이 거리에서, 그것도 만져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었기 때문이다.
1905년에는 일인들이 유리창을 앞세워 종로에까지 진출할 움직임을 보이자 구한말 정부가 종로일대의 담벽과 건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유리창 설치를 금하는 긴급명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종로상권만은 우리 손에 남을 수 있기도 했다.
이후 해방 전까지 24개의 병유리 공장이 들어섰으나 판유리는 어려운 제조공정 때문에 일본에서 전량 수입됐고 6·25뒤 1953년 「운크라」(유엔한국재건기구)가 전후 복구사업으로 판유리공장건설을 계획하면서 판유리 역사가 시작됐다.
운크라가 판유리 제조기술과 돈을 대고 우리정부가 부지를 제공해 1957년 인천에 준공된 판유리공장은 곧 일반인에 불하됐으며 당시 재력가였던 최태섭씨(한국유리 창업주) 등 6명이 「대한유리공업기성회」를 조직해 3억3천만환에 응찰자가 됐다.
그러나 운크라측이 기술부족을 들어 2위 입찰자인 「WS상사」에 낙찰을 결정했고 이 때문에 특혜시비가 일어 논란 끝에 WS상사가 포기, 최씨 등에게 사업권이 돌아가기도 했다.
얼마전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문제 등 그 동안 우리경제계에 있었던 각종 특혜파동의 원조였던 셈이다.
㈜한국유리공업으로 정식 출범한 최씨 등은 그해 10월 국내최초의 판유리를 생산하는데 성공했고(첫 제품은 경무대로 보냄)세계적으로 질이 좋은 우리나라의 바닷 모래를 바탕으로 유리처럼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이효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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