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가 본 아시아 금융위기 10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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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21면

헤지펀드 세계의 빅 플레이어 조지 소로스. 1997년 4월 그는 카리브해 네덜란드령 쿠라카오 섬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시아 통화가치 급락 가능성에 대비한 퀀텀펀드 투자전략 회의를 주관하기 위해서였다. 카리브해 바람은 이미 후텁지근했다. 태국 등의 거시경제 상황과 외환보유액을 점검한 그는 보유하고 있지도 않은 태국의 바트화를 공매도하기로 결정했다. 가치가 하락하면 바트화를 싼값에 사들여 건네주고 차익을 남길 계산이었다.

기업인 투자 본능 상실 … 긴 그림자로 남아

1997년 4~5월 이미 태국의 금융시장은 불길한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96년 중반 방콕상업은행이 파산한 이후 외국계 은행의 자금 회수가 거의 1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여기에다 수출이 감소하고 수입이 급증해 경상수지 적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97년 5월 소로스의 퀀텀펀드 등 헤지펀드들의 바트화 공격이 본격화했다. 방콕 방크헌프롬궁에 자리잡은 태국 중앙은행은 바트화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외환보유액을 쏟아부어 달러에 고정된(페그제) 바트화를 사들였다. 97년 들어 다섯 달 동안 200억 달러 이상을 투입했다. 전체 외환보유액 450억 달러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바트화 가치 사수에 소진한 셈이다.

외환보유액이 급감하고 있다는 소식이 시장에 퍼진 6월,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진입했다. 방콕 증시가 6월 두 번째 주(9~13일)에 10% 가까이 폭락했다. 태국 정부의 공식 항복 선언(페그제 포기)은 두 주 이상 흐른 뒤인 7월 2일 나왔다. 하지만 그해 6월 둘째 주에 동아시아 금융위기는 시작됐다는 게 중론이다.

이를 상기시키려는 듯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주 싱가포르에서 의미 있는 행사를 열었다. 이곳 프레스센터에서 IMF는 ‘아시아 금융위기 10년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IMF 아시아ㆍ태평양 국장인 데이비드 버튼(사진)은 “한국ㆍ태국 등의 거시경제는 위기 직후 빠르게 회복했다”(위 그래프 왼쪽)며 “이들 나라가 추진한 경제개혁과 세계경제 호황 덕분에 상당한 외환보유액을 쌓아 단기적인 리스크는 스스로 관리ㆍ극복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해당국이 위기 이전 세계경제에서 차지했던 위상도 10년이 흐른 현재 거의 복구했거나 더 높아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위기 당사국은 여전히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버튼은 지적했다. 특히 기업의 투자가 되살아나지 않고 있는 게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진단했다.
“(위기 당사국 기업 등의) 투자가 10년이 넘도록 지지부진하다. 물론 투자가 어느 정도 이뤄져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거시경제 상황에 비춰 현재 투자는 적정 수준보다 낮다.”(위 그래프 오른쪽 참조)

버튼은 위기 당사국의 투자 부진을 ‘퍼즐’이라고까지 말했다. 위기 직후 구조조정 시기에 투자가 급격히 감소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지만 10년이 지난 현재까지 지지부진한 게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실제 투자 부진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많은 전문가가 매달렸고 이러저러한 설명을 내놓기는 했다. 어떤 전문가는 중국이 외국 자본을 마구 흡수해 버리는 바람에 한국 등에 투자될 돈이 줄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버튼은 “중국의 투자는 해외 자본보다는 주로 국내 자본을 활용해 이뤄지고 있다”며 “국내총생산에 견준 저축률과 투자율(가운데 그래프)을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저축률이 투자율보다 여전히 높기 때문에 굳이 해외에서 돈을 조달해 사업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버튼은 기업인들의 투자 본능 상실을 꼽았다. 기업인들은 10년 전 위기의 순간 생존의 갈림길에 섰던 쓰라린 체험을 했다. 여차하면 퇴출될 운명이었다.

“기업인들이 그 뒤 위기에 매우 민감해졌다. 현재 리스크 수준이 구조조정 시기보다 훨씬 낮은데도 그들은 객관적인 수치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는 외환위기 이전과 전혀 다른 태도다. “(위기 이전) 한국 등의 기업인은 리스크가 뭔지 몰랐다. ‘국가경제 개발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생각에 정부가 역점을 둔 업종에 자본을 마구 투입했다. 정부도 저금리 자금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이 (정부 역점 사업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보면 나중에 돈 되는 사업을 우선 해당 기업에 배정하는 방법 등으로 보상해 주었다.”(도미니크 바튼 매킨지 아시아ㆍ태평양 회장)

그러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기업인은 투자에 따른 모든 리스크를 스스로 감수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 결과 기업인은 리스크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해졌다는 것이다.
버튼 국장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산업구조가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어야 하는 제조업 중심에서 큰돈이 필요 없는 서비스업으로 이전되고 있는 점도 투자 부진의 또 다른 원인으로 꼽았다.

IMF가 지적한 기업인의 투자 본능 망각은 이미 예견됐다는 지적도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 컬럼비아대학 조셉 스티글리츠(세계은행 전 부총재) 교수는 “연 30%가 넘는 고금리 정책과 금융시장 자유화를 중심으로 한 IMF 처방은 해당 국가의 자산가치를 폭락시키고 산업생산 능력을 사라지게 할 뿐만 아니라 기업인의 도전정신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처방은 없을까. 버튼은 “투자 부진으로 해당 국가의 내수가 되살아나지 않고 있다”며 “내수와 수출 산업의 불균형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정부가 기업의 투자를 촉진하는 쪽으로 거시정책을 추진함은 물론 금융 시스템도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기업들도 투자가 보다 활성화되는 방향으로 지배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IMF는 투자 부진 이외에 변동성이 한결 높아진 자본 유출ㆍ입과 사회 양극화 등도 숙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 해외 자금이 아시아 금융시장에 대거 유입되면서 자산가치의 거품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자산가치에 거품이 낀 뒤 위기 조짐이 나타나면 해외 자금은 들어올 때 속도보다 더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다”고 버튼은 경고했다. 

WHO? 데이비드 버튼 국장은 영국에서 태어났다. 1972년 런던정경대(경제학)를 졸업했다. 76년에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79년에는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81년 IMF에 이코노미스트로 영입된 뒤 2002년 부터 아시아ㆍ태평양 담당 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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