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벼슬살이 머슴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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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벼슬살이는 머슴살이라 했다. 아침에 승진했다 저녁에 쫓겨나기도 하니 믿을 수 없는 까닭이다."

다산 정약용의 말이다. 다산은 틀렸다. 적어도 요즘은 그렇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어지간한 잘못으로는 꿈쩍도 않는다. 주위의 비판이 아무리 모질어도 눈 딱 감고 흘려들으면 그만이다. 어진 임명권자에게 수하의 허물쯤은 제 자식 상처에 앉은 딱지일 뿐이다. 보듬고 감싸기 바쁘다. 그러니 머슴살이란 당치도 않다. 책임은 없고 지체만 고귀하신 영감, 대감 나리들이다. 백성들이 안중에 있을 리 없다. 오직 한 사람, 임명권자의 눈에만 들면 된다.

수를 세자면 손가락이 모자랄 테니 최근 예만 보자. 10만 경찰의 총수 말이다. 세상이 들썩했던 대기업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을 혼자만 모르고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책임이 없단다. 2인자가 총수를 제쳐놓고 일을 처리했다는 얘긴데 책임도 묻지 않고 사표만 받고 마니 너그럽기도 하다. 피의자 측과 통화한 사실이 없다고 잡아뗐다 들통난 것도 뭐가 대수냐는 식이다. 그러면서 언론이 사건을 몰아간다고 불만이다.

모든 걸 언론 탓으로 돌리니 코드 맞는 임명권자의 사랑을 받는다. 그를 임명한 대통령은 조직 내부에서 들끓는 사퇴 압력을 한칼에 자르며 변함없이 애정을 표시한다. "문제가 될 때마다 희생양을 만들려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한다.

사실 그건 우리 경찰 총수의 평소 소신이다. 사행성 오락실에 얽힌 경찰 비리는 업주와 친하다 보니 벌어진 작은 실수다. 음주운전 경찰이 차를 버리고 달아나는 건 처벌 수위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구속된 경찰이 늘어난 이유도 이런 사소한 실수를 언론이 대서특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찰 감사관들은 비위 경찰관들의 징계 수위를 낮춰야 하는 것이다. 모든 잘못은 언론에 있다.

알고 보니 눈물겨운 부하 사랑도 내 속 편한 뒤였다. 코가 석 자가 되면 우선 내가 살고 봐야 한다. 전직 총수의 전화를 받고 "내 힘으로는 안 되니 윗선에 알아보시라"고 말한 부하는 현직 총수 손에 의해 검찰에 넘겨졌다. 이런 게 희생양이지 조직 우두머리가 책임지는 걸 희생양이라 하는 건 철 들고 처음 들어봤다.

이렇게라도 자리를 붙들고 있으면 얻는 게 있는가. 다산의 '목민심서'를 읽어 보길 권한다. 벼슬살이를 정의하기는 틀렸을지 몰라도 벼슬살이를 잘하고 못하는 차이는 제대로 짚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목민관으로 천박한 자는 관아를 자기 집으로 알아 오랫동안 누리려 생각하고 있다가 해임 통보가 내려오거나 해임 소문을 들으면 놀라고 당황해 보물을 잃어버린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모른다. 처자는 서로 돌아보고 눈물 흘리고 아전과 종은 몰래 훔쳐보며 비웃는다. 관직만이 아니라 달리 잃는 것 또한 많은 것이다. 어찌 한심스럽지 아니한가."

잃는 건 자리 하나면 족하다. 몇 개월 더 보전하려고 명예며 신망이며 다 팽개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는 얘기다. 다산은 이어 말한다.

"현명한 목민관은 관아를 여관으로 생각하고 이른 아침에 떠날 것처럼 장부와 서책을 깨끗이 해두고 행장을 묶어둬 가지에 앉은 가을 새가 훌쩍 떠나갈 듯하고 한 점의 속된 애착을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다. 교체 공문이 이르면 즉시 떠나고 활달한 마음가짐으로 미련이 없어야 맑은 선비의 행실이다."

다산의 결론이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비록 어사가 도끼를 가지고 일을 파헤치고 사신이 바람같이 달려와 창고를 봉하더라도 어찌 나의 터럭 하나라도 움직이겠는가. 목민관이 정치하는 틈틈이 마음으로 이를 깨우친다면 일을 당하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앉은 자리를 저녁에 떠난다는 각오로 임해야 구차함 없는 벼슬살이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다산의 정의가 틀린 게 아니다. 이미 구차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어도 다음 그 자리에 가게 될 나리들이 마음속에 새겨야 할 진리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