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9)제88화 형장의 빛(34) 여인의 모정 박삼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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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김천교도소 보안과장을 통해 여사에 있는 한 재소자가 나를 꼭 만나게 해달라고 하니 한번 들러달라는 전갈이 왔다. 81년 늦가을께였다.
최진숙이라는 이 중년 여인은 이번에 딸이 대학입시를 치르게 됐는데 밖에 있는 다른 어머니들처럼 자식 뒷바라지도 못했으니 합격기원 기도라도 해주고 싶어 나를 만나자고 했다는 것이었다. 막상 마음이 급해서 나를 불러놓고도 내가 먼 길 온 것에 대해 감사하고 송구스러워했다. 이처럼 조신하고 모정이 강한 여인이 왜 죄를 지었을까.
그녀는 처녀시절 전화교환원으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한 남자를 사귀어 동거하게 되었다. 그녀는 딸 한명을 낳자 남자에게 결혼식을 올리자고 졸랐으나 남자는 자꾸 미루기만 했다. 알고보니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어느날 본부인이 찾아와 욕설을 퍼붓고 못살게 굴어 동네에서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순진한 처녀를 유혹해 아이까지 낳게한 남자의 무책임에 화가 나서 그 남자와 헤어졌다.
한번 결혼해 아이까지 딸린 여자의 삶은 평탄할 수가 없었다. 우선은 살기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남의 집살이·보따리장사·공사판보조등 안해본 일이 없었다.
그렇게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첫 남편에게서 받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 무렵, 또 한 남자를 만났다. 웃으며 다가서는 남자를 믿을 수 없어 처음에는 망설이고 뿌리쳤지만 집요하게 유혹하는 남자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다시 시작한 결혼생활의 단란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두번째 남편의 숨겨진 모습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다.
홀아비인 줄 알았더니 그때까지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자그마치 10명이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아무일도 하지않고 종일 방에 처박혀 있거나 만취가 되어 와서는 행패를 부리고 심하게 구타해 견딜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아들이 태어났고, 남편은 자식의 아버지를 구박해서야 되느냐고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여자 혼자 벌어 식구들 먹여 살리고 남편에게 돈 뜯기고 구타당하는 지옥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남편은 새로운 여자들을 사귀면서 유흥비를 뜯어갔다. 어쩌다 돈을 못주면 멍이 들도록 때렸다. 아무것도 원치 않으니 제발 자기 곁을 떠나달라고 애원해도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그녀를 괴롭혔다.
생활의 질곡이 너무 깊고 어두워 그녀는 살아나갈 힘을 잃었다. 추운 겨울 어느날, 자식들과 죽을 결심으로 방안에 연탄화덕을 들여 놓고 잠을 청했다. 남편은 한번 집을 나가면 며칠씩 떠돌아다니다가 돈이 떨어지면 들어오곤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 남편은 술에 취해 들어와서 자다가 남편만 죽고 그녀와 자식들은 살아났다. 자식들과 살기 힘들어 죽으려고 선택한 수단에 남편이 우연히 걸려든 것뿐, 죽일 의사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살아나서 생각해보니 부모 잘못 만나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릴뻔한 자식들이 못내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정상이 참작되어 5년형을 받았다. 그동안 저축한 돈이 좀 있었지만 자식들 장래가 걱정되어 쓰지 않고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고 재판을 받았다.
나는 그 여인의 부탁대로 딸의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려주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원 덕분에 딸은 부산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 여인을 다시 찾았을 때 바깥 세상에 나가면 자식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겠다며 밝게 웃어 보였다.
꽃처럼 곱게 웃을 수 있는 그 여인을 그토록 불행하게 만든, 얼굴도 모르는 두 남자의 이기심과 무책임이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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