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여영기자의 취재후기

재연배우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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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전 낯선 이름 하나가 포털사이트 인기 검색어 1위에 올라왔다. '여재구'라는 탤런트가 자신이 살던 집 뒤뜰에서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사진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재연(再演) 배우'라 했다. 재연 배우의 씁쓸한 인생에 대한 몇몇 기사도 읽었다.

재연 배우란 현장 재연을 전문으로 하는 배우를 일컫는 신조어다. '경찰청 사람들'을 시작으로 MBC '타임머신'등 우후죽순 쏟아진 실화 재연 프로에서 탄생한 말이다. '솔로몬의 선택'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유명 수퍼모델들과 신인 연기자들이 상황 재연을 하며 연기에 입문했다. 트로트 가요 '어머나'로 스타덤에 오른 장윤정도 신인 시절 한때 재연 배우로 활동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재연 배우'라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연 드라마는 사극·시트콤·드라마처럼 연기자가 활동하는 하나의 분야일 뿐이다. 하지만 방송가에서는 '재연 배우는 배우도 아니다' '재연배우는 급이 낮다'는 식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때문에 신인 연기자들은 재연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한다.

여재구씨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 문득 떠오른 몇 명의 탤런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연 배우란 도대체 무엇이며,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물어보고 싶었다.

전화를 받은 연기자들은 대부분 대답을 꺼렸다. 자칫 자신이 '대표적인 재연 배우'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사랑과 전쟁'을 통해 인기를 모았던 유지연씨는 솔직하고 당당하게 대답해 주었다. "'재연 배우'라는 직업은 없으며, 그런 편견 때문에 힘들어하는 연기자만이 존재한다"고. KBS 18기 공채 탤런트로 입사한 유씨는 오랜 기간 연기 경험에 비추어 힘겹게 살아가는 동료 연기자들의 고충을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유씨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기사가 인터넷에 나간 다음 네티즌 독자들의 반응은 말 그대로 뜨거웠다. 최주철씨는 "연기에 몰입하는 당신이 아름답다"고 했고 오정태씨는 "멀리서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는 실력파 연기자들이 제대로 대우받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일반 시청자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연기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땀을 흘리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멋진 모습으로 등장해 시청자를 즐겁게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시작이 재연 드라마였다고 해서 이들을 영원히 '재연 배우'라는 틀에 가둬서는 안 된다. 언젠가 이들이 한국의 연예계를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제 2의 신구.나문희.이순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자들도 현재의 어려운 상황과 편견에 굴하지 말고 더욱 멀리 보고 연기에 혼신의 정열을 쏟아야 한다.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