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10분의 1 게임'을 중단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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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가 정치부패 청산이라는 본질을 떠나 일종의 정권공방전으로 변질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른바 '10분의 1' 발언으로 검찰 수사는 수사가 아니라 盧정권의 임기를 좌우하는 문제가 돼버렸다. 지금 대통령 지지자들은 10분의 1이 될까봐 불안.초조하고, 반대자들은 빨리 10분의 1을 넘겨 盧정권의 중도낙마 기회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 내년 총선 죽기살기式 불보듯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를 보면서 사람들은 처음엔 그 엄청난 부패 규모에 놀라고 정경유착 실태에 분노했다. 이런 개탄과 분노는 당연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 시정책이 뭘까 하는 사회적 고민으로 연결되고 정치개혁으로 결실을 봐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盧대통령의 10분의 1 발언은 이런 가능성을 날려버렸다. 사람들의 관심은 부패의 원인과 시정책보다는 대통령의 불법자금이 10분의 1을 넘느냐 아니냐에만 온통 집중되고 있다. 대선자금 수사를 마치 축구게임이나 경마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뿐 아니라 10분의 1 발언으로 나라는 지금 새로운 갈등과 분열에 빠져들고 있다. 10분의 1이 안 되기를 바라는 세력과 넘기를 바라는 세력 사이에 깊게 틈이 갈라지고 서로 간에 불신과 의심이 뭉게구름처럼 커지고 있다. 대기업이 盧후보 측에도 돈을 안 줬을 리가 없는데 왜 그쪽에선 나오는 게 없느냐, 권력과 검찰이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닌가, 부패한 수구반동들이 우리를 흔들고 있다… 등의 의심과 불만이 근거가 있든 없든 쏟아지고 있다. 지난주 여의도의 한쪽에선 "괜찮아, 4년 남았다"는 소리가 터져나온 반면 2백m 떨어진 다른 한쪽에선 "하야하라" 는 성명이 낭독되고 있었다. 바로 지금 상황의 현주소가 아닌가. 盧대통령이 10분의 1이란 말로 의도한 게 이런 상황이었을까.

이렇게 조성된 분열과 갈등은 검찰 수사가 어떻게 결말나든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수사 결과 10분의 1이 넘게 나오면 노사모가 승복할 것인가. 그래서 盧대통령은 사임할 것인가. 사임 기준이 검찰발표인지 법원 확정판결인지 새로운 시비는 나오지 않을까. 10분의 1이 안 나오면 반대세력은 승복할까. 검찰과 짜고 쳤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10분의 1이 안 됐다고 盧대통령을 깨끗하고 도덕적인 인물이라고 인정할까. 10분의 1 발언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을 이런 분열과 증오는 내년 총선까지 계속 고조될 게 분명하다. 이대로 가면 내년 총선은 죽기살기식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상황을 누가 과연 감당할 것이며 누가 치유할 것인가.

결국 우리는 '10분의 1 게임'에서 탈출해야 한다. 국가의 운명을 '10분의 1'에 걸어서도 안 되고, 검찰수사가 대선투표일 수도 없다. 10분의 1 문제로 대통령이 실제 사임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엄청난 국가적 혼란사태를 의미한다. 모든 국정의 올스톱, 헌정 변칙사태, 두달 내 대통령선거, 새 정권, 새 정부…. 이 엄청난 일을 겪는 것이 국익에 부합할까. 각 정당이 이런 상황을 치러낼 10% 준비라도 돼 있을까. 말이 쉬워 대통령의 중도사임이지 실은 엄청난 일이다.

*** '살아있는 권력'이 입 열어야

盧대통령도 지금쯤 아마 후회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이 약속을 철회한다고 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황당한 게임의 중단을 위해서는 야당이 모처럼 '크고 건설적인' 한 수를 두는 게 좋겠다. "우리는 10분의 1이 넘어도 사임 요구를 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당장 철회하라"고 한다면 어떨까. 그 요구를 盧대통령이 받아들이면 된다. 비록 자존심은 좀 상해도 나라를 위해서는 그 길이 낫지 않을까. 야당도 10분의 1 게임을 '기회'라고 보면 착각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정권이 오고 가지는 않는다. 양쪽이 이 문제를 이처럼 대국적으로 풀 때 지금의 죽기살기식 대결에서 한가닥 상생의 작은 기운이 조성될는지도 모른다. 대신 盧대통령은 할 일이 있다. 자기의 대선자금 관련자료를 빨리 공개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 고통스러운 대선자금 터널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는 기업이 입을 다문다고 한다. 검찰도 그 점에 애로가 많다고 한다. 盧대통령이 만일 살아있는 권력을 믿고 부하들만 감옥에 보낸다면 비겁한 보스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겠는가.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