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유로파』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쉽게 펼쳐나가는 그저 그런 영화보기를 즐기는 이보다 새로운 영상표현이 영하의 본질이라는 상식 정도는 가진 이에게 흥미 있는 영화다. 무엇보다『유로파』의 생명은 실험적인 영상언어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의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철로의 영상이 빠르게 흘러가면서 해설자 막스 폰 시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관객에게 최면을 건다.『당신은 지금부터 내 목소리를 듣는다. 내 목소리는 당신을 영화 속으로 깊이 인도한다…. 열까지 헤아리면 당신은 영화 속에 있게 된다.』
줄기차게 주인공 레오와 관객을「당신」이라고 부르며 동일시하는 내레이션에 이끌려 이야기는 펼쳐진다. 레오는 2차대전후패전국인 조국 독일에 봉사하러온 이상주의자 청년으로 젠트로 파열차의 침대 칸에서 일한다. 따라서 영화의 대부분은 기차 안에서 진행되는데, 관객 역시 기차 안에 앉아 이 모든 일을 경험하는 듯한 최면에 빠진 상태로 영화를 보게 된다.
레오/관객 앞에 강하면서도 매혹적인 여성 카타리나(바바라 수코바)가 등장하면서 드라마는 흥미진진해진다. 반 연합군 테러를 일삼는 독일 민족주의 조직 베어 울프의 비밀요원인 카타리나는 레오를 사로잡는다. 마침내 그녀와 결혼까지 한 레오는 아내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자신의 이상주의가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레오는 아내를 인질로 삼아 기차에 폭탄을 설치하라는 베어 울프의 지시보다 자신의 파멸을 위해 기차와 함께 자폭한다. 특히 이 부분을 서술하는 영상 구성은 볼만하다.
레오의 머리 속을 지배하는 폭탄의 시계가 거대한 클로스업의 흑백 영상으로 배경이 되어 보여지는 동시에 그 앞에는 초조하게 시계장치로 뛰어가는 레오의 모습이 컬러로 조그맣게 보여진다. 공간적 거리를 심리적 거리로 압축해 표현한 이러한 영상기법은 이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데올로기와 맹목적인 민족주의, 그 사이에서 좌초되는 이상주의를 통해 악몽 같은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유로파』는 과거 독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직도 그 악몽을 안고 사는 우리의 분단된 현실이나 작금의 유고사태 등을 볼 때『유로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당신은「유로파」의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경고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이 영화의 서술장치의 의도를 깨닫게 해준다. <유지나·영화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