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새콤달콤책읽기] 킬러의 숙명 타고난 야생 동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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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우리는 사람만이 이 땅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산다. 오만한 착각이다. 우리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곳에 수많은 동물들과 벌레들, 식물들과 미생물들이 살고 있다. '가시도치의 회고록'(알랭 마방쿠 지음, 이세진 옮김, 랜덤하우스 코리아)을 읽으면 알게 된다. 그 오만한 착각이 또한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는지. 조심하시라. 방심하는 사이, 작은 가시도치가 당신의 이마 한가운데 날카로운 가시 한 개를 찔러 박고 유유히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소설의 배경은 '세케팡베' 라는 이름을 가진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마을. 소설은 일인칭 화자 느굼바의 육성으로 전개된다. 그는 인간에 의해 '야생짐승'으로 명명되는 가시도치이다. 온몸이 가시로 뒤덮인 포유류의 일종일 뿐이라고 무시하면 오산이다. 그는 야생짐승이라고 발음하며 마치 자신들은 야생적이지도 짐승 같지도 않다는 듯이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는 인간들을 비웃는다.

아프리카에서는 사람에게 '해로운 분신'과 '평화의 분신'이 있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느굼바는 주인인 키방디의 '해로운 분신' 노릇을 하도록 운명지워진 존재다. 그는 키방디의 명령에 따라 아흔 아홉 번의 살인을 대신 저지른다. 살의는 사소한 이유들로부터 비롯된다. 청혼을 거절당할 것 같아서, 꿔 간 돈을 갚지 않아서, 사람은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잡아먹을 때는 반드시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질투, 분노, 시기, 모욕, 존중의 결여 같은 이유들 말이다.' 제삼자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적나라한 인간사가 우스꽝스럽고 서글프다.

소설은 주인이 죽은 뒤 홀로 도망친 가시도치가 바오바브나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식을 띄고 있는데, 어쩔 수 없이 킬러의 숙명을 타고난 느굼바의 고뇌와 비애에 집중해 보면 한 감성적 킬러의 고백으로 읽히기도 한다. 또한 범인을 밝히기 위한 무당의 굿이나, 억울하게 죽은 사체를 담은 관(棺)이 장례식에서 아기 캥거루처럼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장면들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한 민속지가 된다.

콩고 출신의 작가 알랭 마방쿠는 이 책을 불어로 썼다.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준 민담을 바탕으로 한 고향 아프리카의 이야기로 작가는 프랑스 문단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르노도상을 받았다. 인간과 동물, 제국과 식민지, 살인자와 피해자라는 이중적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그 선을 무너뜨리는 잡종((hybrid)적 상상력이 놀랍다. 프랑스라는 '제국'의 언어를 마음껏 가지고 놀면서 모국의 구전(口傳)에 오마주를 보내는 것, 글 쓰는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축복과 해방의 순간이다. 작가는 맨 마지막에 말한다. '사람과 동물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진짜 짐승입니까? 엄청난 의문입니다!'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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