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관 둔지 10년 만에「감독변신」시도|"시력장애도 영화열정 못 막죠"|미서 영화 학 공부 중 망막이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최근 사람들 사이에서는『전 국회의원 이철용씨가 공동연출로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가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와 함께 영화준비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영호씨(39)라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사람들은「이영호」라는 이름엔 고개를 갸우eND했다.
「기억력이 좋은」혹자는 10여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어제 내린 비』『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바람불어 좋은 날』『낮은 데로 임하소서』등의 영화에서 제법 개성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연기를 보여줬던 전 영화배우 이영호씨를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영화감독 이장호의 동생이라는 것과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 학을 전공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를 잘 알고 있는 혹자는 그가 시력이 급격치 떨어지는「몹쓸 병」으로 박사과정도 도중에 포기해야만 했다는 안타까운 얘기도 덧붙일 것이다.
하지만 이씨 본인은 그를 설명하는 이런 문구들이 다소 장황하기만 할 뿐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사람들이 자신을 뭐라 기억하든 이제는「영화감독」이영호로 새롭게 서기 위해 노력을 다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영화배우로 활동했던 지난 시절과 영화의 세계가 갖는 의미를 배우며 느꼈던 희열의 순간들이 지금의 자리에 오기 위해 필요했던 길이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가 이철용씨와 영화준비작업을 시작한 것은 지난 6월. 여러 번에 걸친 시나리오 수정작업도 이젠 거의 마무리돼 현재 약간의 걸림돌이 생겨 지연되고 있는 재정문제만 해결되면 크랭크 인은 시간문제다. 두 사람이 영화를 함께 만들기로 한 것은 이미 10년 전에 공동제작의 뜻을 모으면서부터. 지난 80년 이철용씨 원작『어둠의 자식들』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그는 이철용씨의 삶을 배우려고 따라다니며 함께 생활하다 인간적으로 방해 그와 단짝친구가 되었다. 이씨는 그의「친구」이철용씨를 말하면서「밑바닥 생활에 대한 풍부한 경험,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타고난 감수성」을 그의 장점으로 꼽는다. 「그의 그런 장점이 인간적인 면모로서는 물론이고 영화감독으로서도 성공할 자질」이라고 믿는단다.
그러나 이씨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감수성이 풍부하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기 꺼려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나이 차가 7년이나 되는 형 이장호씨가 일찌감치 영화계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란 그저 형의 일이고 그는 다소 관심 있는 관객일 뿐이었다. 고교시절 문학도가 되고 싶었던 꿈을 접어두고 홍익대 미대로 진학해 조각을 전공했다. 겨울이면 냉기가 도는 작업실에서 손을 녹여가며 조각가로서의 꿈을 키우던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갑자기 영화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오히려 조각에 대한 그의 열정이 부추긴 외도 였다.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늘 비어있기 일쑤였던 주머니를 단 한번의 영화출연료로 두둑 히 채워 조각에 몰두해보자는 계산이 그를 카메라 앞으로 유혹했다.
74년 당시『별들의 고향』이라는 영화로 주목을 끈 이장호씨가 새로 시작하는 영화『어제 내린 비』의 주인공으로 동생인 그를 캐스팅 했다. 『비사회적인 주인공의 성격이 동생과 아주 흡사하다』는 게 형이 내세운 이유였다. 성격이 닯아 캐스팅을 했지만 그의 연기력에 대해 불안했던 형은 어느 날 집에 돌아와 그에게 대본을 던져주며 연기를 해보라고 시켰다. 그것은 주인공이 우울하게 전화를 하는 장면이었는데 형 앞에서 전화수화기를 들고 대본을 읽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렸고 이를 본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디션 결과는 합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멋도 모르고」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씨는 74년부터 82년까지 모두 14편의영화에 출연했고, 82년『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마지막으로 배우생활을 정리했다. 『연기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커져가고 있었고 영화를 직접 만들어볼 욕심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 그가 설명하는 이유. 그 후 그는 미국에서 시각예술학교와 뉴욕 대에서 각각 학사·석사과정을 마쳤다. 미친 듯이 공부에 전념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바람에 박사과정 도중 공부를 포기하고 89년 귀국해야만 했다. 병명은 망막색소변성증. 급격히 시력이 악화되고 심한 경우에는 시력을 잃기도 하는 불치병이다. 귀국해 그는 지금까지 자기와 같은 종류의 병명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RP협회」를 만들고 증세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는 방법 등의 정보를 함께 나누는 일에 시간을 보내왔다. 그는 지금도 책을 읽을 때면 활자를 확대하는 기기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다행히 악화가 정체된 상태에서『일하는데는 별로 지장이 없다』며 웃는다.
『영화로 돈을 벌 생각이라면 미국에서 장사했을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흥행에만 눈독을 들여 만드는 감각적이기 만한 영화가 염려스럽다』고 꼬집는다. 『이성과 감성에서 모두 뛰어난 우리 영화에 대한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영화로 승부를 걸어볼 작정입니다』라는 짧은 말로 다부지게 각오를 밝히는 그는 요즘 사회성 있는 메시지를 세련된 감각으로 통쾌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연구하느라 늘 긴장해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앞으로 우리나라 실화를 주제로 오늘의 현실을 투영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며 비장한 포부를 밝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