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베르사유 만찬과 문화 세일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이날도 300년 전 어느 날처럼 연회가 열리고 있다. 가발을 뒤집어 쓴 귀족들과 파팅게일을 넣어 잔뜩 부풀린 드레스의 귀부인들 대신 간소한 현대식 정장 차림의 선남선녀들로 초대 손님만 바뀌었을 뿐이다. 연회의 주최자는 삼성전자 프랑스 법인이다. 프랑스 전역의 구매상을 초대해 신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근사한 원형 탁자에 둘러앉아 '시종'들이 날라오는 음식과 포도주를 즐기는 300여 프랑스 업자의 얼굴에 흥분과 감동이 차고 넘쳤다.

프랑스의 문화재 마케팅이다. 자기네 대표적 문화재를 외국 기업에까지 연회장으로 내준다(물론 기업 이미지 등을 고려해 엄선한다). 자체 수익 사업으로 문화재 보존에 들어가는 막대한 예산을 절약한다는 취지다. 꼭 돈만이 목적은 아니다. 싸매고 막고 가리는 것만 보호가 아니라는 게 이들의 철학이다. 문화재와 함께 숨 쉬고 느껴야만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보호할 필요성을 체득하게 된다는 얘기다. 프랑스뿐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궁전, 독일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역시 같은 목적으로 같은 수익 사업을 한다.

우리 문화재 당국도 그런 '다가가기' 철학에 제법 눈뜬 모양이다. 30년 넘게 꼭꼭 숨겨 뒀던 창덕궁 후원(後苑)의 문을 열어젖히고, 고종 황제가 다과회를 베풀던 덕수궁 정관헌(靜觀軒)을 개방해 시민이 참여하는 다례 행사를 여는 모습은 보기에도 좋다. 절대 보존이란 엄숙주의를 떨치고 참여와 활용으로 문화유산을 본래 주인들의 품에 돌려준 것이다. 받은 즐거움이야 더 할 나위가 있으랴.

그런데 이런 문화재도 연회와 어울릴라치면 돌연 사팔눈들이 많아지는 게 참 묘하다. 지난주 곤욕을 치렀던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왕릉 오찬 사건도 그런 의미에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유 청장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왕릉의 가스통은 아무래도 경솔했다. 원래 재실(齋室)이란 게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관들이 음복(飮福)하는 장소라지만 잠깐 실수로 재가 될 수 있는 문화재 앞에서 굳이 고기를 구울 일은 없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만찬 역시 모두 외부에서 조리해온 찬 음식들로 채워졌다. 흡연도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동이 줄진 않았다. 오히려 그만큼 소중한 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감격이 더 컸다.

문제는 장소가 어디든 고기를 구워야 먹은 것 같고 대접한 것 같은 촌스러움이지 '그 장소'에서의 식사가 아니다. 특히 '그들만의 파티'라는 시각이 생각을 더욱 딱딱하게 만든다. 몇 해 전 국제검사협의의 경회루 만찬, 세계신문협회.세계철강협회의 창경궁 만찬 때도 이런 시각이 있었지만 그렇게 몰아붙일 일이 아니다.

창경궁 명정전은 임금이 외국 사신을 맞던 장소다. 경복궁 경회루는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꿀릴 게 없는 자랑스러운 역사 유산이다. 이런 곳에 세계 지도층 인사들을 불러와 설명하고 만찬을 베푼다면 그 감동은 분명 곱절이 될 터다. 그게 문화 세일즈다. 프랑스에서 삼성 휴대전화가 몇 년째 판매 1위를 하고 있는 것도 베르사유의 만찬과 무관하지 않다. 그때의 감동을 아직도 기억하는 한국 기자처럼 말이다.

목조 건물이 많고 데울 음식이 많은 우리 문화 특성상 프랑스보다 조심해야 할 게 많다. 하지만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담그지 않을 순 없다. 분명한 기준을 세우면 된다. 합리적이고 안전한 기준에 맞게 문화재 내 행사 준칙을 만든다면 문제될 게 없다. 왕릉까지 가스 배달을 갈 일은 더더욱 없을 터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