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58)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그림=김태헌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서점에 들렀다. 아저씨에게는 예전에는 볼 수 없던 어떤 빛이 어리고 있었다. 글쎄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광채라고 하기에는 좀 덜하고 기색이라고 하기에는 좀 더 즐거운, 어떤 밝음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인사를 하고 그리고 서로 엄마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내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는 먼저 그 말을 꺼내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나로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을 좀 골려주고 싶은 기분도 있었다. 왜냐하면 예전과는 달리 나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눈빛에는 어른들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부끄러움 같은 것이 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른들에게 남아 있는 어린이의 흔적이었고, 흠, 실은 좀 귀여웠다. 어른들이, 나이가 많이 먹은 어른들이 귀엽다는 것은 내게는 아주 좋은 의미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내게 즐거운 서점 아저씨는 내게 책 꾸러미를 내밀었다. 고양이에 관한 책들이었다.

"글쎄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우선 책을 보고 시작하거든. 어릴 때, 엄마에게 실내 수영장에 가게 해달라고 하기에는 생활이 너무 빠듯했고 그래서 수영을 책으로 배웠어. 자유형은 물론이고 평영, 배영 나중에 접영까지 마스터했지."

내가 놀란 눈으로 아저씨를 바라보며 물었다.

"책으로 수영을요?"

"별로 어려운 일 아니야. 이불을 펴놓고 날마다 연습하면 돼."

"…그래서 …아저씨 지금 수영 잘해요?"

내가 묻자 아저씨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대답했다.

"몰라, 동작은 정확하다고 남들이 그러긴 하던데 아직 물에 들어간 본 일은 없어서."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저씨는 계속했다.

"10년 전쯤엔가 골프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책 10권을 사다놓고 밤을 새워 읽고 또 읽었지. 결론은 그것이었어. 연습은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은 정확히 맞혀야 한다…. 뭐 그런 후로는 왠지 그 말이 믿음직해서 열심히 연습도 하고 공을 정확히 맞히려고 노력했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 친구놈은 결혼하기 전에 신방 연습을 책을 사다놓고 하기도 했는데 뭐."

"네?"

내가 다시 묻자, 아저씨는 참, 네가 아직 학생이었지 하는 걸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물론 아기가 말이야… 말하자면 말이야… 허니문 베이비가 결혼을 한 날로부터 일주일 후에나 생겼다고는 하더라…."

내가 목을 뒤로 젖히고 깔깔거리자 아저씨는 약간 겸연쩍은 표정이 되더니 책들 사이에서 한 권을 골라 내게 내밀었다. 미국 작가가 쓴 '파리로 간 낭만 고양이'라는 책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책이야. 시리즈로 몇 권이 있는데, 고양이를 키워 본 경험은 없지만 나도 많은 걸 느꼈어. 한번 읽어 봐라."

첫 장을 펼치자 거기에는 특이한 대목이 있었다. 작가가 자신에 대해 진실이라고 믿는 열 가지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

1. 절대로 공화당에는 투표하지 않는다. 2. 엄밀히 따져보면 영원한 사랑이란 없다. 3. 나는 야구 중독자다. 4. 인생이란 기본적으로 슬픈 것이다. 5. 나는 어디에든 소속되는 게 싫다. 6. 우정이란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이다. 7. 잔인함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8. 친절함보다는 즐거움과 지성을 택하겠다. 9. 나는 메릴 스트리프가 형편없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10. 나는 고양이를 싫어한다.

킥킥 웃음이 나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