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서 봉노릇은 이제 그만(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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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라살림이 커지고 국민소득이 늘어나면 각 경제주체들은 거기에 맞게 개방과 자율의 길을 찾고,관련제도도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활의식이 제도가 요구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결국 자신의 활동영역을 규제당하는 정부간섭을 자초하고 만다. 또한 외국으로부터도 중진국다운 거래질서와 신용,유교적인 전통에 따른 절도있는 생활양식을 보여주지 못하면 졸부나 봉 정도로 취급당하게 마련이다.
정부는 25년만에 외환관리 규정을 대폭 개정해 불필요한 규제를 과감히 풀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조치는 기업의 국내외 영업활동과 관련된 외환업무의 규제는 과감히 철폐하고 그대신 개인송금 등에 대해서는 관리를 더욱 강화해 소액의 자금까지 추적을 불사한다는 것을 주요골자로 하고있다.
우리나라는 개방폭을 확대하면 외화가 불법유출되는 일이 많고 그렇다고 이를 다시 규제하면 기업과 개인의 창의적 활동이나 생활범위가 축소되는 일이 반복되는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다. 따라서 우리국민 의식이 제도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느냐의 여부가 앞으로 계속될 일련의 개방정책의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여행자유화 조치 이후 나타난 우리나라 해외관광객들의 헤픈 소비행태를 시정하기 위해 정부가 몇가지 규제조치를 취했으나 한국인은 여전히 펑펑 돈잘쓰는 졸부로 소문나 있다. 중국의 연변에서조차 달러로 부를 과시하는 「추악한 한국인」이란 오명을 듣고있다.
독립국가연합에서 한국인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는 현지 대학교의 등록금 현황에서 잘 나타난다. 미국인 유학생에 이어 두번째로 비싼 등록금을 한국인 유학생에게 청구한다는 것이다. 일본 유학생보다도 비싼 등록금을 물리는 이유는 한국인들이 돈을 잘쓰고 으스대는 행태 때문이다.
정부는 30억달러 차관을 선뜻 제공하고도 아직도 눈에 띄는 프로젝트 참여조차 못하고 있고,유학생들은 모스크바 등지에서 봉처럼 대접받고 있는게 현실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총외채는 지금도 4백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올해 50억달러의 무역적자가 예상되는 우리 국민이 1백42억달러의 흑자로 고민하는 대만보다 풍성풍성 하게 돈을 쓰고 있으니 걱정이다.
외환관리 규정의 대폭적인 규제완화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에 수반될 부작용을 어떻게 막느냐가 우리들의 관심사다. 문제는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법과 제도만으로 막을 수는 없으며,더구나 또 다른 규제가 자칫 국제화의 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우리들의 경제범위가 커진만큼 국내외에서 절도 있고 계획성 있는 생활을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달러의 씀씀이도 결국 우리의 국제성을 측정하는 하나의 중요한 가늠자라고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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