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사장제 필요없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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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축구선수를 느닷없이 야구코치로 기용한다면 누가 봐도 웃을 일이다. 그런 납득못할 인사가 정부투자기관의 이른바 이사장이란 자리에서는 오랜 기간 태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사장이라면 실제 경영책임을 지지는 않더라도 그 기관의 가장 높은 어른으로서 세세한 실무는 모르더라도 업무의 큰 줄기를 파악하고 지도하는 「어른노릇」은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5공때부터 정부투자기관 이사장이란 자리에는 과연 「어른노릇」을 해낼 수 있을지 지극히 의심스러운 인사들이 많이 기용되는게 관례처럼 돼버렸다. 그 분야의 업무와는 전혀 인연이라고는 없는 군장성·정치인·경찰출신 등을 마치 실업자에게 소일거리 주듯 임명해온 것이 이사장인사였다.
이번에 산업은행이사장이 된 권정달씨의 경우도 전형적인 그런 예다. 권씨는 보안사출신의 5공 신군부 주도세력의 한사람으로 군과 정보,정치에 반생을 보낸 사람이다. 그가 내막적으로 금융에 관해 공부를 해왔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경력의 인물을 금융기관 이사장에 앉힌 것은 누가 봐도 적재적소라고 보긴 어렵다. 게다가 권씨 임명은 그의 3·24총선 출마포기에 대한 보상차원의 배려라는 소문까지 나오니 이 인사의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사장 자리에 대한 정부의 이런 인사관행은 정부 스스로 이사장자리를 아무기여를 안해도 좋은 바지 저고리로 만드는 것으로 불필요함을 자인하는 것이다. 정부로서는 신경을 써줘야 할 집권세력 주변인물의 취직용으로 이사장자리를 이용하는게 편할지 모르지만 그 자리를 지탱하는 돈이 결국 국민부담이란 점을 생각하면 국민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인사를 잘못하면 인사권자의 위신이나 신용이 깎이는 것은 물론이다. 우리는 6공들어 납득하기 어려운 여러 인사사례를 보아왔고 그것이 정부의 위상에 적잖게 손상을 끼쳤다고 본다. 특히 비상식적 인사는 임면권자의 능력과 저의에 의심을 불러 일으키고 인사물의를 빚은 해당기관의 업무관리·추진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
우리는 혹시라도 임기말을 앞두고 정부가 공직을 전리품처럼 또는 사물시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물러나기에 앞서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봐줄 사람은 봐주자는 식의 분위기가 정부안에 조성된다면 큰 일이다. 늘 걱정하는 권력의 누수현상이 딴게 아니라 바로 이처럼 스스로의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번에 문제가 된 정부투자기관 이사장제는 더이상 둘 필요가 없고,그러므로 폐지해야 한다는데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믿는다. 아마 정부 스스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정부투자기관들 역시 원하는 만큼 이번 기회에 폐지의 단안을 내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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