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월 군 작전 권 놓고 미와 줄다리기|"못 준다"박대통령 설득 끝내 관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채명신 전 주월 사령관은 6·25때 위안부대를 겪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도 월남전에의 위안부대 파견을 반대했다고 증언했다.
『6·25때 국군은 위안부대 조직을 활용했어요. 위안부들은 중대규모로 편성돼 단체생활을 했고,「활동」에 따른 소득은 자기들 조직에 내는 부담금을 빼고는 본인들에게 돌아갔던 것으로 압니다. 연대장 이였던 나는 전투에서 공을 세운 사병들을 우선적으로 위안부대에 보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사기진작에 도움이 됐습니다. 그 부대를 먼저 다녀 온 사병들이「이제부터는 장교 님들도 제 동생뻘입니다」고 칙칙한 농담들을 하면서 자랑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월남전은 상황이 다르지요.』

<"여자 1년만 참자">
채 사령관은 부하들에게 정신훈화 때마다『1년만 참아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회고했다.『너희들이 목숨 내건 덕으로 손에 쥔 달러를 낭비하지 말라. 외출해서 꽁가이(월남아가씨)손 한번 잡아보고 술 한잔 먹으면 그 돈은 다 없어진다. 휴양소에 가면 술은 얼마든지 있다. 여자는 1년만 참아라. 술도 마시고 마음껏 수영도 하고 해서 피로를 푸는 게 낫다. 돈은 모아 두었다가 귀국할 때 텔리비전이라도 한대 사 갖고 가라. 부산에서 팔면 새끼돼지 수십 마리 값을 받을 수 있다. 그 돈으로 고향 가서 소를 사 키우고 장가도 가라.』
실제로 파월 장병들이 귀국할 때 들여온 각종 전자제품들은 큰돈이 되어 가난에 찌든 농촌 곳곳에 단비처럼 뿌려졌다.69년도에 열아홉 살이던 가수 김추자양이 정열적인 율동을 섞어 불러 크게 인기를 끌었던 가요『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와 함께.
전투부대 파병과 함께 한미양국간에 가장 굵직한 현안으로 등장한 것은 작전지휘권 문제였다. 이미 한국에서의 작전 권을 확보하고 있던 미국 측은 월남에 파견된 법력에 대해서도 지휘권을 행사하겠다고 고집했다.
우리측에서 작전 권 협상을 주도했던 김성은 당시 국방부장관은『처음 밝히는 내막』이라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때 월남 군은 독자적인 작전 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월남이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지만 자존심만큼은 매우 센 나라입니다. 나는 전투부대 1진을 보낼 때 이훈섭 선발대장(당시 준장·육사7기)등 지휘관들에게「작전지휘권에 대해서는 한-미-월 3자 협의체제를 고수하라. 그래도 역부족이면 본국정부 소관사항이라고 미루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장군 등은 그대로 따랐지요. 미국 측은 안되겠다 싶었던지 주한 유엔군사령부를 움직이기로 한 모양입니다. 비치 유엔군사령관이 우리측 장창국 합참의장을 만나 월남에서의 작전 권 이양을 종용한 거예요.』
장창국 장군은 김성은 국방장관을 만나『미국이 저렇게 나오니 그냥 넘겨주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김 장관은『안 된다. 내게도 생각이 있다』고 대답했다. 며칠후 김 장관은 박대통령의 호출을 받았다. 『대통령께서 제게「브라운 미 대사를 만났더니 당신이 지휘권이양을 한사코 반대한다고 불평하더라. 특별치 반대할 이유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나대로 생각해둔 이유를 말씀드렸지요.』

<세 가지 이유로 반대>
이 자리에서 김 장관은 세 가지 근거를 댔다. 첫째, 미군에게 지휘권을 넘겨주면 우리는 싸울 곳을 선택할 수 없게 된다. 디엔비엔푸(54년5월7일호지명의 베트민 군이 함락시킨 베트남 북서부의 군사 요충지. 이 전투에서 참패한 프랑스군은 결국 월남에서 손을 떼게된다)를 상기해야 한다. 우리국내정세가 이제 계엄령도 지나고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데 만의 하나 월남 오지요새에 한국군이 배치돼 전멸이라도 당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회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싸울 굿은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 현재처럼 트로이카체제(3자 협의체제)로 하면 국군은 비교적 안전하고 퇴로가 열려있는 해안선 지역에서 작전할 수 있다.
둘째, 월남인의 80%이상이 해안선을 따라 나 있는 1번 도로 주변에 살고있다. 이 지역을 택하면 대민 사업 면에서 매우 유리하다.
셋째, 우리 기업들이 월남에 진출할 경우 대개 해안에 집중적으로 분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근로자와 기업인들은 우리 군대가 지켜주는 것이 낫다.
박대통령은『김 장관 말이 맞다. 요즘 브라운이 자꾸 나를 찾아오는데 또 오면 당신에게 보내겠으니 알아서 처리하라』고 일을 맡겼다. 얼마 후 브라운이 김 장관을 찾았다.
『브라운이 정색을 하고 따지기에 대답해 주었지요.「한국에서는 미군이 한국군을 지휘하고 있다. 그런데 월남에서 미군은 월남 군을 지휘하지 않는다. 만약 한국군이 월남에서조차 미군의 지휘를 받는다면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다. 우리는 그린 상황을 바라지 않는다」 고 설득했어요.』

<브라운 미 대사 굴복>
김 장관은 덧붙여『만약 미군이 월남 군을 지휘한다면 우리도 미군휘하에 들어갈 용의가 있다. 그러나 현 상태에서는 곤란하다. 지금처럼 트로이카체제로 가자』고 쐐기를 박았다. 이 설득은 먹혀 들어갔다.
우리 군대의 작전지휘권은 우리가 갖게 됐다.
월남파병은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아래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정황 속에 이루어졌지만 그 대신 우리 군대는 싸울 장소만큼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월남의 밀림 속에 용광로를 만들어 놓고 포탄껍질을 녹여 국내에 몰래 반입해 그 돈으로 국내에 버젓한 고등학교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우리의 독자적인 작전지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국의 폐품도 국내에서는 보물취급을 받던, 불과30년도 지나지 않은 가까운 과거의 한국을 지금의 우리는 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처럼 잊고있는 것은 아닌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