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 기간 남았는데 추방 위협 여성 노동자에겐 성희롱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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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02면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아시아 5개국 대사 초청 세미나’에 참석한 대사들이 앉아 있다. 신인섭 기자

건설근로자 강모(33)씨는 두 달 전 ‘지옥’을 체험했다. 지난 3월 서울 신도림동 주상복합 화재 사건 때다. 27층에서 일하던 강씨가 치솟는 불길과 유독가스에 의식이 희미해질 무렵, 누군가 그를 부축하고 옥상으로 뛰었다. 구조 후 병원 응급실에서 강씨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찾았지만 “도망갔다”는 말을 들었다. ‘은인’은 몽골인 불법체류자였다. 당시 몽골인 4명은 이렇게 불길 속에서 한국인 11명의 목숨을 구해낸 뒤 응급실로 실려갔다가 링거 주사기를 뽑고 잠적했다. 강제추방이 두려웠던 것이다.

亞 5개국 대사, 한국의 아시아계 근로자 차별에 쓴소리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다. 지난해 4월 말 기준으로 국내 체류 외국인은 53만 명. 그러나 한국사회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신도림동 화재사고는 보여주고 있다.

국회의원 외교모임(회장 유재건)은 11일 아시아 5개국 대사(태국ㆍ필리핀ㆍ몽골ㆍ베트남ㆍ인도네시아)를 초청해 자국민의 한국 생활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한국은 ‘아시아 형제국’들에 어떻게 투영돼 있을까. 대사들은 일부 한국인들이 아시아 근로자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르진훈데브 페렌레이 몽골 대사=“인천국제공항에 갈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입국자격을 집중 심사하는 인터뷰방이라는 게 있다. 외국인 근로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심사가 까다로워) ‘거기 들어가라’고 하면 입국 거부를 당했다고 생각할 정도다. 어렵게 인천공항을 나오더라도 공장에 가서 보면 평소 보고 듣던 한류와는 상황이 다르다. 사장님 태도 다르고, 한국인 노동자들 보는 눈도 다르고. 사장님은 무조건 ‘이거 하라’ 시키기만 한다. 거기서부터 문화충돌이 있게 된다. 한국 사회는 빠르게 다문화 국가로 변하고 있다. 여기엔 외국인 노동자들의 역할이 크다. 아쉽게도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시각이 안 좋다. (신도림동 화재사건을 언급하며) 아주 딱한 상황에서 불법체류자들 없었으면 한국인 11명의 생명은 어떻게 됐을까. 좋든 싫든 더불어 사는 불법체류자의 입장도 이해해줬으면 한다.”(몽골 대사는 평양에서 대학을 나와 10년 이상 한국에 체류했다. 연설도 한국말로 했다.)

▶바신 테라 베치안 태국 대사=“마사지 업소에서 인권침해가 있다. ‘한국 가면 돈 많이 번다’고 유혹해 데려온 뒤 약속보다 적게 준다. 때론 매춘도 요구한다. 단속과 관련법규 강화가 필요하다.

고용주의 폭력,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성희롱 등의 불만 사안이 대사관에 접수된다. (불법체류자가) 자발적 출국 프로그램에 따라 스스로 공항에 나타나면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재입국이 어렵게 되는 문제도 고쳐야 한다.”

▶자콥 토빙 인도네시아 대사=“2005년 기준으로 한국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 중 절반이 불법체류자였다. 정책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다. 고용주가 권리를 침해할 때 외국인 근로자들은 두 가지 길밖엔 선택할 수 없다.

계속 똑같이 불리한 조건으로 일하든지, 아니면 이탈해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뿐이다.”

▶수잔 카스트렌스 필리핀 대사=“임금체불이나 언어ㆍ신체적 폭력 등에 대한 불만 사안이 많이 접수된다. 심지어 비자 유효기간이 남아있는데도 고용주 등이 추방하겠다고 위협한다. 추방 위협이 있으면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팜 티엔 반 베트남 대사=“한국은 베트남의 5대 교역국이다. 베트남 근로자가 4만5000명 일하고 있다. 베트남 여성도 2만 명이 시집왔다. 양국관계엔 조화와 균형이 좀 더 필요하다. 베트남은 한국인에게 15일 무비자를 허용하는데 한국은 여러 규제로 비자를 받기 어려워 가고 싶어도 못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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