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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을 읽는 몇 가지 방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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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06면

『남한산성』은 역사소설이다.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한 47일간의 역사를 소설은 무연히 재현한다. 하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수다한 독자들이 『칼의 노래』에서 시대를 넘나드는 삶의 가치를 읽어냈던 것처럼 『남한산성』에도 생을 향한 여러 관점과 이념이 엉켜 있고 포개져 있다.

김훈이 한사코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고 못박은 건 『남한산성』의 당대적 함의(含意)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서였을 터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담론 형성은 쓰는 자가 감당할 바가 못 된다. 오롯이 읽는 자의 몫이다.

김훈의 의도와 무관한 여러 담론 중 하나가 『남한산성』이 처한 상황을 최근의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겹쳐서 읽는 방법이다. 오늘의 정치권이 한ㆍ미 FTA를 민족 생존의 문제로 언급했던 것처럼 370년 전의 임금 또한 살고자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진 신동연, 권혁재 기자

김훈에게 가장 난감한 독법은, 뭐니 해도 작가의 개인사를 함부로 유추하는 것이다. 김훈을 안다는 몇몇은, 왕 앞에 엎드려 피눈물로 화친을 아뢰는 최명길의 말과 글에서 1980년의 김훈을 떠올린다. 그때 김훈은 한 일간지의 문화부 기자로서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이란 기사를 떠맡았다. 그는 “내가 안 썼으면 딴 놈들이 썼을 테고, 난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라고 겨우 말했다. 진정 사실이 그러했다. 김훈은 문장이 빼어나다는 이유만으로 낙점됐고, 군부(軍部)가 편집국 동료를 때리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고서야 연필을 쥐었다.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김훈이 소설 책 머리에서 적은 문장이다.

문장이 이야기를 낳는다

김훈의 문장을 두고 평론가 서영채는 ‘이야기가 있어 글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중된 글의 긴장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라고 말한 바 있다. 김훈의 저 유명한 문장은, 익히 알려진 대로 온몸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김훈은 연필로 글을 쓰고, 반드시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연필을 들어 쓴다. 그래서 저녁마다 지우개 똥이 눈처럼 쌓이고 두어 장의 원고가 늘어간다.

『남한산성』은 『칼의 노래』이후로 김훈 문장의 특장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다. 단호하고 신랄한 김훈의 문장은 기름진 수사나 끈적대는 비유 없이도 풍요롭고, 요염하다. 소설을 읽으며 숱하게 밑줄을 그었지만 한두 문장으로 추려 내놓는 건 어려운 노릇이었다.

산성에서 맞는 겨울의 참혹한 풍경, 강화도에서 피란민이 참살당하는 장면, 최명길의 항복 문서, 김상용이 김상헌에게 부친 다급한 글 등 알알이 빛나는 구절은 열거하기에도 벅차다. 특히 김훈이 ‘작가의 말’ 대신 ‘하는 말’이라고 이름 붙인 짧은 글은, 상징적인 몇 줄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읽을수록 재미가 붙고 맛이 우러난다.

진실의 힘과 삶의 이치

소설의 주된 갈등은 의외로 성 안에 있다. 주전파(主戰派) 김상헌과 주화파(主和派) 최명길 사이에서 엇갈린 말은 모두 옳고, 또 모두 그르다. 김훈은 이 둘의 말을 비롯하여 성 안팎을 떠돌던 수많은 말을 옛 문헌에서 끌어다 썼다. 거침없는 칸의 글이나 천노(賤奴) 출신의 청병 통역 정명수가 인조에게 뱉은 모진 말, 길을 묻는 과객의 어조로 묻는 인조의 한탄 어린 물음, 항복 문서를 쓰라는 임금의 밀명을 면하고자 고의로 추한 일을 적어 올린 정육품 수찬의 안타까운 문장까지, 모두 출처가 있는 것들이었다. 정사(正史)가 아니면 야사에서라도 김훈은 찾아서 썼다.

그렇다고 기록만 옮겨다 놓은 건 아니다. 소설은 되레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오로지 제 본분 앞에서만 진실한 민초의 삶에서 꿈틀대고 파닥거린다.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송파나루의 늙은 사공이다.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도 사공은 강을 떠나지 않는다. 김상헌이 연유를 묻자 사공은 답한다.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 해서….” 김상헌이 사공의 목을 베는 장면을, 김훈은 이렇게 적었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사공은 풀이 시들 듯 천천히 쓰러졌다.’

늙은 상궁의, 단 한 줄의 삶도 사무친다. 왕의 행렬이 언 강을 건널 때 간장독이 깨지자 늙은 상궁은 눈보라 속에서 운다. 사대부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묘당(廟堂)의 정통성 따위와 늙은 상궁의 눈물은 무관하다. 그래야 이치에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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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서울 출생. 한국일보ㆍ한겨레ㆍ시사저널 등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1995년 장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발표하며 늦깎이 작가가 됐다. 장편 『칼의 노래』는 한국 문학 중 유일하게 프랑스 ‘갈리마르 세계문학선집’에 선정됐으며 단편 ‘언니의 폐경’으로 황순원문학상을, 단편 ‘화장’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문단의 상찬과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받는 몇 안 되는 작가지만, 정작 자신은 ‘자전거 레이서’라고 말하고 다닌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칼의 노래』『현의 노래』, 단편집 『강산무진』, 산문집 『문학기행』(공저) 『자전거 여행』 등이 있다.

‘김훈과 남한산성’ 독자 참여 프로그램 주요 일정

5월 17일 오후 1시 서울 동국대: ‘남한산성과 나의 문학’ 주제로 강연
20일 오후 3시 서울 교보문고 강남점: 독자 사인회
23일 오후 2시 인천 경인여대: ‘김훈 문학과 인생’ 주제로 강연
29일 오전 9시: 김훈과 함께하는 남한산성 답사-1
한국관광공사(www.knto.or.kr)
YES24(www.yes24.com) 홈페이지에서 접수
6월 1일 오후 2시 부천 가톨릭대학: ‘남한산성과 나의 문학’ 주제로 강연
9일 오전 9시: 김훈과 함께하는 남한산성 답사-2
27일 오후 6시30분 부산 영광도서: 작가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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