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차에 길터주는 베를린 운전자들(특파원 코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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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퇴근길 체증불구 쫓기듯 인도로 차빼기까지
며칠전 볼일이 있어 오후 늦은 시간에 베를린 시내에 나갔다.
마침 퇴근 시간이어서 왕복 6차선도로가 매우 붐볐다.
통일후 동베를린 시민을 중심으로 자동차 구매붐이 인데다 폴란드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의 차로 퇴근시간인 오후 4시쯤부터는 대부분의 도로가 이처럼 막히는게 요즘 베를린의 교통상황이다.
푹푹 찌는 날씨에 거북이운행을 하자니 짜증도 났다.
갑자기 어디선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뒤쪽이었다. 백미러로 살펴보니 병원 구급차였다. 도로는 그야말로 꽉 막힌 상황이었다.
구급차가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했다.
이때 백미러 안에선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구급차 앞에서 서행하던 자동차들이 일제히 오른쪽 깜빡이를 켜더니 인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놀란 듯한 그 모습이란 마치 매에 쫓긴 꿩을 연상케 했다. 모두들 기를 쓰고 인도를 타고 올랐다. 앞에 늘어섰던 차들도 모두 이 행렬에 동참했다.
마주 오던 차들도 조금씩 오른쪽으로 길을 비켰다.
이 틈으로 구급차는 요란한 사이렌과 푸른 경광등을 번쩍이며 전속력으로 달려나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도로위엔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 거북이 운행이 계속됐다.
꼭 무엇엔가 홀린 기분이었다. 잠시후 이 기분은 상쾌한 감동으로 변했다. 만약 촌각을 다투는 환자를 싣고 가는 구급차가 교통체증에 걸려 환자가 목숨을 잃었다면 이처럼 어이없는 비극이 어디 있을까.
이같은 상황이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보았다. 서울시민들도 베를린시민들처럼 이같은 기적을 연출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이와 함께 얼마전 서울의 어느 종합병원 원장이 경찰백차엔 잘도 길을 비켜주면서 병원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엔 못들은체 인색한 우리의 운전문화를 지적한 글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운전하는 사람들 모두가 조금씩만 양보하면 아무리 막히는 도로라도 구급차가 지나갈 공간은 생기게 마련이란 생각이 든다.
성숙한 시민의식이 만들어내는 이 공간은 물리적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삭막한 도시생활을 조금은 밝게 해주는 정신적 여유의 공간이다.<베를린=유재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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