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도올고함(孤喊)

'천년학'이 1000년을 살게 하려면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나는 3년 전 홍릉에 있는 영화진흥위원회 시사실에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 '하류인생'을 보러간 적이 있다. 고생을 해서 만든 작품을 처음 중요한 손님들에게 선보이는 순간이란 감독이나 제작자의 입장에서 여간 설레는 것이 아니다. 난 작품을 다 보고 나와서 모든 사람들이 점잖게 입을 다물고 앉아 있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이렇게 다짜고짜 외쳤다.

"이걸 작품이라고 만드셨습니까? 주인공 인생이 하류가 아니라, 당신 영화가 하류올시다."

나는 임 감독님과 만나면 항상 이렇게 싸운다. 그런데 임 감독님은 이런 난감한 도올을 놓고 풀이 죽지 않는다. 씩씩거리며 골을 부린다. 물론 예술에 대한 평가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주관적 느낌일 뿐이니까.

'천년학'을 찍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난 현장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임 감독님도 나에게 책(대본) 한 권 보내지 않았다. "한번 마음대로 찍어보슈."

임 감독님의 최초의 대박 흥행 영화 '장군의 아들'(1990)은 나 도올이 대본을 쓴 것이다. 그 작품 개봉 전날, 나는 꿈을 꾸었다. 돈암동 옛집 앞 골목 코너에 있는 공중전화통에 10원짜리 동전을 넣었는데 우르르 동전이 쏟아져 나왔다. 그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임 감독에게 꿈 얘기를 했다. 그날 예상대로 대박이 터졌다. 유치한 연상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나의 정신세계와 임 감독의 의식세계는 밀착되어 있었다. 칸영화제에서 상을 타낸 '취화선'도 나의 대본이었다.

불행하게도 '천년학' 개봉 당시 나는 사하라사막을 헤매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난 홀로 조용히 대한극장에서 '천년학'을 보았다. 스크린 앞에서 반짝이는 내 눈에선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정말 원없이 찍으셨구나!

나는 '한국독립운동사'10부작을 찍기 위해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전(長田)마을의 이최선(李最善)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양녕대군의 16세손으로 노사 기정진의 학통을 이은 천하에 부러울 것 없는 권세가였지만 3대가 모두 구국 의병운동에 헌신했다. 이최선은 병인양요 때 의병을 일으켰고, 아들 이승학(承鶴)은 기우만과 함께 장성의병을 일으켰고, 손자 이광수(光秀)는 순천 벌교의 나철과 함께 을사오적암살단에 가담하였고 초기 계몽운동에 헌신했다. 바로 이 이최선가의 큰집에서 '비날론'의 발명자 이승기(升基) 박사(6.25 당시 서울대 공과대학장)가 나왔다. 이 집안의 영민한 여인이 장성의 임씨댁으로 시집을 갔다. 천년학의 한을 품은 임권택이라는 예술가가 바로 이들의 품안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을 이때 나는 우연히 알게 되었다.

소소한 남의 집안 이야기를 내가 어찌 여기에 다 풀어낼 수 있으리오마는 당신의 겸손한 고백대로 "피란통에 배가 고파 영도다리에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여기 증언해놓고 싶다. 조상의 바른 업을 이은 한 예혼(藝魂)이 이 산하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이 빚어낸 빼어난 소리를 한번 원없이 영상에 담고 싶었으리라! 임권택은 사라져가는 우리 문명을 지키는 이 시대의 의병장 노릇을 고고히 견지했던 것이다.

"감독님! 이제부터 영화 찍으실 만하겠구려. 양보 못할 성공이요, 감독님 인생 역정의 대 쾌거이외다."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한 스크린쿼터 축소의 폐해는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단기간에 치고 빠져야 하는 와이드 릴리스 방식의 배급도 이런 영화에는 너무도 불리하다. 흥행 실패를 도저히 작품 탓으로 돌릴 수 없다면, 한류에 암울한 구름이 끼기 전에 구제책을 생각해 봐야 한다. 몇 개의 극장만이라도 옛 단관 개봉식으로 이 작품을 석 달 정도는 계속 틀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을 상업논리로만 끌어내리는 것은 참다운 '우리 문화'를 폐쇄시키는 것이다. 사계의 양심에 호소한다. 오정해의 자연스러운 소리연기, 양방언의 음악, 김혜순의 의상, 정일성의 카메라… 그 모든 것이 좋았다.

도올 김용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