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콘스 자존심 보여준 보석같은 1이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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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16면

현대 7회초 1사상황에서 솔로홈런을 날린 이택근. 

지난 1일 잠실 LG전이었다. 그 경기 8회 초에 그들의 자존심을 보았다. 그 한 이닝에 그들이 간직한 고고한 기품을 보았다. 그들의 이름 앞에 ‘영원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충분한 위신과 체통을 그들은 지니고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

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8>

처음엔 한때 강렬했지만 사그라지는 불꽃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1-3으로 뒤진 8회 초였다. 상대는 ‘달라진’ LG였다. 지난해까지 현대의 지휘봉을 잡았던 ‘그’ 김재박 감독이 벤치에 있었다. 현대를 모를 리 만무했다. 그 다 잡은 승기를 놓칠 리 없었다.

선두타자 전준호가 좌전안타를 때렸다. 아주 작은 전율이 구장을 휘감았다. 서른여덟의 베테랑이 때린 그 안타 한 방. LG의 3년차 중간투수 심수창이 그때 흔들리고 있다고 느끼긴 어려웠다. 후속 김일경이 볼카운트 2-0에서 연속 네 개의 볼을 골라낼 때까지는.

무사 1, 2루. 김재박 감독이 타임을 불렀다. 역시 결정이 빨랐다. 왼손타자 이숭용을 상대로 왼손투수 류택현. 이숭용은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번트 모션을 취했다. 이 순간, 전율은 파장이 됐다. 그는 팀의 3번타자. 전날까지 10경기 연속안타를 기록 중이었고 타격 1위였다. 번트를 대면 연속안타 행진이 멈추지만, 서른 여섯의 ‘주장 이숭용’에게 그런 개인적인 사치는 없었다.

번트는 정확히 투수와 3루수 사이 쪽으로 굴렀다. 1, 2루 주자를 안전하게 진루시킬 수 있는 타구였다. 눈길을 끈 건 이숭용이 열심히 뛴다는 거였다. 그런데 작게 넘실대던 파장이 큰 파도가 됐다. 류택현의 1루 악송구. 순식간에 주자 만루가 됐다. 현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기세였다. 그래도 아직 1-3이었다.

브룸바. 현대에서 뛰다가 2년 동안 일본 오릭스에 갔다 온 ‘현대맨’이다. 그를 잘 아는 김재박 감독은 잠수함투수로 상대했다. 우규민. LG가 자랑하는 마무리투수다. 8회 초 무사에 마무리투수. 강수였다. 브룸바가 맞은 3구째는 바깥쪽 꽉 차는 공. 정직했다. 우규민은 브룸바가 이 타구를 잡아당겨 3-유쪽 땅볼을 때려주길(병살타가 될 수 있도록) 원했지만 브룸바의 시선은 2루수 머리 위를 보고 있었다. 우전안타였다.
두 명의 주자가 홈인했고 3-3 동점이 됐다. 우규민은 김이 샜다. 송지만과 정성훈에게 연속 몸맞는공을 내줬다. ‘맞혔다’기보다 ‘맞았다’고 해야 할 공들이었다. 피하지 않았다. 팀 승리를 위해서는 언제라도 몸을 갖다댈 열정이 그들에겐 있었다.

4-3. 역전을 허용한 김재박 감독은 김민기를 마운드에 올렸다. 더 이상의 실점을 막아보자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택근과 김동수의 연속 우전안타가 나왔고 그걸로 6-3이 되면서 승부의 추는 기울었다.

이어 터진 전준호의 2타점 적시타는 현대의 승리를 확인하는 개선장군의 환호였다.

이숭용의 번트에서, 송지만과 정성훈의 몸맞는공에서, 브룸바ㆍ이택근ㆍ김동수의 안타가 모두 오른쪽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현대는 그들의 탄탄하게 다져진 ‘로열티’를 느끼게 해주었다. 126경기 시즌의 단 한 경기, 9이닝 가운데 단 한 이닝에 한국시리즈 4회 우승팀으로서의 자부심을 분명하게 일깨워줬다.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구단의 미래가 불투명하다지만, 현대는 분명히 건강하게 살아있었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놓치기 아깝다. 어쩌면 그들이 가는 마지막 시즌이기에 더 소중하고, 더 비장해서.

네이버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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