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반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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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솔로몬 사원 문을 지날 때 우리는 말을 탄 채 무릎 높이까지 올라온 피의 강을 지나갔다. 사원은 오랫동안 이단자들로부터 불경스러운 모독을 당해왔으니 바로 그 장소를 이단자들의 피로 가득 채운 것은 하느님의 훌륭한 심판이 아닐 수 없다."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이 7만명의 무슬림을 살육한 현장에 대한 기록이다. 솔로몬 사원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모두 성지로 여기는 예루살렘의 심장이다. 기독교도에겐 솔로몬이 세웠던 성전이 있던 곳,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곳으로 소중하다. 무슬림에겐 예언자 마호메트가 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를 받으며 승천했던 성지다. 그래서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43년 이곳에 교회를 세웠고, 이후 예루살렘을 점령한 무슬림은 715년 그 자리를 이슬람 사원으로 만들었다. 십자군이 마침내 이 성지를 되찾아 문자 그대로 피로 제단을 씻었던 것이다. 십자군의 잔혹함은 자신들의 종교만이 옳다는 독선에서 비롯됐다. 다른 종교와 문화는 곧 경멸과 파괴의 대상이었다. 도그마적 종교관에서 비롯된 문명파괴, 곧 반달리즘(Vandalism)이다.

그로부터 1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0년 3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상과 화해-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제목의 참회서를 공표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교황은 지난 2천년간 교회의 죄상을 고백하고 사죄를 구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대표적 범죄로 적시했다. "십자군 원정은 인류를 피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성지회복이란 숭고한 목적의 이면에는 너무나 불손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유럽인의 아픔이 이슬람보다 클 수는 없다."

종교적 반달리즘은 전근대적인 부족신관(部族神觀)에서 비롯된다. 자기 부족을 지켜주는 신을 섬기던 전근대적 사회의 배타적 종교관이 포용성을 갖추지 못하고 폐쇄적 형태로 굳어버린 경우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극단주의 정권이 세계 최대 불상인 바미얀 석불(石佛)을 파괴한 행위는 21세기까지 살아남은 종교적 반달리즘으로 국제사회를 분노케 했다.

최근 수도권 일대 성당의 성모상을 훼손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각박해진 사회상이 혹시 종교적 반달리즘에까지 이른 게 아닐까 우려된다. 성탄의 축복을 함께해야 할 이즈음에.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