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으로「우리 것」추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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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이영학 조각전이 열리고 있는(13일까지) 국제화랑에 들어서면 마치 옛이야기가 구수한 고향에 온 것 같다.
전시장 입구에선 마을 어귀 마냥「장승」이 손을 맞고, 사랑방에서 할아버지 얘기가 새어나오듯「호랑이」가 담뱃대를 문 조각작품이 빙긋이 웃고 있다.
화강암「동자상」위에 일부러 올려놓은 돌멩이들이 고개 마루에 있던 성황당을 연상케 한다.
지하 전시장으로 내려가면「봉황새」가 울음 울고「까치」가 지저귄다.「학」이 한 다리로 서있고「오리」가 뒤뚱거리며 걷는다. 그야말로 온갖 새들이 자기의 특성을 자랑하는 경연장 같은 곳이다.
「봉황새」는 낡은 상여에서 떼어냈고,「까치」는 낫과 연탄집게로 만들었다. 목안 부서진 것으로「오리」를 연출하고, 가위·대나무 빗자루로「학」을 제작했다.
이영학(44)은 이번 조각전을 위해 전국의 고물상이란 고물상은 빠짐없이 누비고 다녔다.
고물상에서 우리 조상들이 쓰던 낫·쇠스랑·호미·망치·못·연탄집게·가위·대나무빗자루·삼끈·당그레·절구공이 등 농기구와 일상용품을 사들여 이것들을 재료로 새로운 조각작품을 만든 것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못지 않게 그의 발상전환이 돋보이는 전시회다.
이영학은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79년)하고 이탈리아에 유학, 81년부터 87년까지 로마시립 장식미술학교·예술원에서 공부했다.
외국 유학을 마치고 온 작가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서양병」을 툴툴 털어 버리고 우리 것을 찾아낸 이영학의 벼름이 고맙기까지 하다.
작가의 말마따나『서양조각은 다시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실증으로 보여진 신작 발표전이다.
자연-생명체의 재구성을 참신한 조형언어로 엮어낸 그의 창작력은 전시장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만 다녀오면 번쩍번쩍하고 값비싼 그쪽 대리석으로 작업하기 일쑤인데, 이영학은 그걸 마다하고 우리나라어디에나 있는 그 흔한 화강암으로 작품을 빚었다.
우리 어머니들이 입고 살았던 무명옷처럼 소박한 화강암의 질감에 작가의 순수한 조형의식이 보태져 한결 정감이 가는 따뜻한 작품들을 대할 수 있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일은 새로운 걸 많이 보여주겠다는 욕심이 앞선 나머지 작품전시방법이 좀 어수선하다는 점이다. 전시방법도 총체적으로 보면 작품이라는 생각을 가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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