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긴 악연이 한나라당 ‘빅2’를 괴롭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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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07면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경선 대결 충돌 지점에 두 사람이 서 있다. 이재오 최고위원과 정인봉 전 의원이다. 한 번씩 큰 개인적 상처를 입은 이들은 ‘줄 세우기’ 논란과 검증 파동 속에서 대선 국면의 긴장요인이 되고 있다.

한달 반 만에 박근혜 캠프 나타난 정인봉 전 의원 “이명박 관련 새 자료 제출할 것”

#장면1
2일 오후 2시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너편에 있는 박 전 대표의 캠프 사무실. 이 전 시장을 상대로 검증 공격에 나서 파문을 일으켰던 정 전 의원이 나타났다. 2월 15일 박 전 대표 법률특보직에서 사퇴한 지 47일 만이다. 그는 검증 관련 물의로 ‘3개월 당원권 정지 처분’을 받았었다. 정 전 의원은 7일 “이 전 시장과 관련해 수집된 새 검증자료를 (새로 구성될) 당 검증위원회에 제출하겠다”며 또 한번의 논란을 예고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2월 검증 파동으로 당에 반성문도 냈는데.
“검증을 그만둔다고는 안 했다.”

-자료가 어떤 내용인가.
“공적인 도덕성 관련 문제에 접근 중이다. 내가 (이 전 시장 공격의) 선봉장이 되다 보니 정보를 주는 사람이 생긴다. 국내에도 있고 국외에서도 들어온다.”

#장면2
지난해 3월 24일 오전 9시 국회 본관 2층 한나라당 원내대표실. 이재오 최고위원(당시 원내대표) 주재로 주요 당직자회의가 열렸다. 이 전 시장이 여권의 ‘황제 테니스’ 공세에 시달리던 때다. 이방호ㆍ정병국ㆍ윤건영ㆍ진수희 의원 같은, 현재 이 전 시장 캠프의 핵심 멤버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 전 시장 옹호에 나선 것은 당시 인권위원장이던 정인봉 전 의원이었다. 그는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이명박 시장에 대해 근거도 없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점에 대해 경고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최고위원이 “최근의 테니스 사건을 이름도 이상하게 붙이고…”라며 거들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 정 전 의원은 이 전 시장의 보호자에서 그에 대한 저격수로 돌변했다. 당 주변에선 이런 과정을 지난해 7ㆍ26 재ㆍ보궐 선거의 공천 파동과 연결짓는다. 국회의원 4수 끝에 2000년 4월 총선에서 당선(서울 종로)된 정 전 의원은 선거법 위반으로 2002년 6월 의원직을 잃었다.

지난해 재ㆍ보선에서 한나라당 강세지역인 서울 송파갑 후보로 공천이 확정, 국회 복귀의 희망을 갖게 됐다. 하지만 전당대회를 앞두고 TV 토론에 나선 이 최고위원이 ‘성 접대’ 전력 등을 이유로 정 전 의원을 비판한 뒤 공천이 취소됐다. 정 전 의원을 박 전 대표가 법률특보로 기용했다. 그래서 이 최고위원이 적극 돕는 이 전 시장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정 전 의원이 분노를 터뜨리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구원(舊怨)의 표적이 되긴 박 전 대표도 마찬가지다. 이재오 최고위원이 공격수다. 두 사람의 갈등은 오래됐다. 2004년 8월 구례 연찬회에선 크게 싸웠다. 박 전 대표는 자신을 ‘독재자의 딸’로 표현했던 이 최고위원에게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대표를 흔들려면 아예 나가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 최고위원이 기억하는 악연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내용은 이렇다.

“국제사면위 한국지부 사무국장이던 1979년 강연차 안동에 가면서 안동댐에 들렀다. 큰 비석이 있기에 보니 대통령 딸인 박근혜씨의 방생 기념탑이었다. 그런데 댐 건설 중 숨진 인부들의 위령탑은 한쪽 구석에 초라하게 서 있더라. 강연에서 ‘이런 게 바로 유신 독재의 실체’라고 했다가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됐다. 구치소에서 맹장염에 걸렸는데 꾀병이라며 방치해 복막염이 됐다. 그때 수술로 아직도 배에 큰 흉터가 남아있다.”

그런 이 최고위원은 지난해 1월 원내대표에 당선되자 박 전 대표와의 화해에 공을 들였다. 박 전 대표의 생일(2월 2일) 땐 노란 장미도 선물했다. 7월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오르기 위한 가식이라고 의심받을 때면 “가까이 모시면서 박 전 대표의 애국심을 알게 됐다”고 정색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 쪽은 강재섭 대표를 지원했다. 여론조사에서 1등을 한 이 최고위원은 당원ㆍ대의원 투표에서 밀려 당대표가 되지 못했다. 이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에게 얼마나 잘했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분노감을 표시했다.

이 최고위원은 과거처럼 박 전 대표를 공개 비판하는 대신 새로운 방식으로 설욕에 나섰다. 박 전 대표가 장악해온 ‘당심(黨心ㆍ당원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이 전 시장 쪽으로 돌려놨다. 이 전 시장이 많이 밀렸던 당심 경쟁의 판세를 바꾸는 데는 이 최고위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성균관대 의대 오강섭(정신과) 교수는 “사람이 중요한 목표를 추구하면서 형성되는 ‘콤플렉스’가 타인에 의해 손상되면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복수의 심리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최고위원과 정 전 의원의 잠재적 폭발력이 큰 이유는 두 사람의 활동이 양 캠프의 최대 관심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가 경선에서 이기려면 이 전 시장의 지지율이 깎여야 한다. 박 전 대표 진영이 이구동성으로 검증을 강조하는 이유다. 하지만 선뜻 악역을 맡을 사람은 없다. 따라서 공천취소의 고통을 겪은 정 전 의원의 막무가내식 행동이 가장 큰 변수가 되고 있다.

당심이 긴요한 이 전 시장에게 이 최고위원의 도움은 절실하다. 전당대회의 상처가 깊은 그에게 섣불리 중립을 요구해봐야 누군들 좋은 소리를 못 듣는다. 지난달 29일 강재섭 대표가 당직자의 캠프 줄서기를 경고했다가 이 최고위원으로부터 “박 전 대표의 지원으로 당선된 강 대표야말로 사퇴하라”고 역공당한 게 한 예다. 박 전 대표 쪽엔 “자신들이 중립을 지키지 않고서 새삼 중립 운운하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라고 냉소한다.

물밑에선 서로 걷어차면서도 수면에선 웃어야 하는 게 당내 경선의 아이러니다. 지금 물속 발길질을 추동하는 힘은 이런 복수(復讐)의 에너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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